이문열의 고향 동네를 걷고 있다는 문자를 이제서야 받았소, J형!

 반구대 안쪽 한실마을에는 손전화가 안 터지기 때문이었소.

 

 

 

 

지난밤 왁자했던 웃음들이 잦아든 한실에 물안개가 피고 있소.

지천명을 넘기고도 인생은 왜 이다지 오리무중(五里霧中)이오?

길(路)에서 길(道)을 묻는 형의 그 고뇌가 한실의 물안개로 피어납디다.  

 

 

 

 

가을에는 누구나 길을 잃곤 하나 보오. 참 대책없는 일이오.

소소소 떨어진 나무잎으로 길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숲 속을 이리저리 헤매는 마음.

길을 찾아 헤맨다기 보다 길을 잃기 위해 헤맨다고나 할까, 우리 나이에 이 계절은.

 

 

 

 

열댓 가구가 살고 있는 한실은 사연댐 상류의 수몰지역이라우.

몇년 전 여기 왔을 땐 사람들이 살던 집터가 그대로 드러나 참 처연했었는데...

영혼이 떠난 몸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떠난 집은 흉흉하기 짝이 없습디다.

 

 

 

 

잠자리를 몹시 가리는 내가 참 달콤하게도 잤소. 꿈 하나 없는 잠이었소. 

모닥불에 전어를 구워먹던 시간도, 복실아부지 넉살에 눈물을 흘리며 웃던 시간도 가고

마당에서 밤새도록 피워내는 얘기꽃을 베개 삼아 황토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 게요.

 

 

 

 

 장소는 때로 사람을 기억한다는 거, 형은 알고 있소? 가지산 입석대는 내게 참 잊지 못할 곳이오.

작년 다르고 올 다른 건 비단 몸 뿐이 아닌 듯하오. 내가 변했는지 세월이 변했는지 모를 일이오. 참 모를 일이오.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는 한 남자를 만났소.

뭉게구름이 입석대에 걸리는 순간을 기다리며 삼각대를 세워놓고 가을산에 빠진 그 남자.

모름지기 그만한 정성이 있어야 원하는 사진을 건지는 게 아니겠소.

사람 인연도 다르지 않다고 보오. 간절함이 없는 사이는 구름같이 흩어질 뿐이겠지요.

 

 

 

 

만산홍엽의 가지산 주능선을 친구와 둘이 바라보았소.

넷에서 만난 이 친구는 내가 남들한테 자기 흉을 본다 해도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소.

참 고운 사람이오. J형도 그런 친구 있소?

 

 

 

 

 저 불타는 가을이 아름답지만은 않은 건 내가 나이를 먹은 증거 아니겠소?

저 화려함 뒤의 적막함. 빈 몸으로 건너가는 겨울까지...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이오. 

 

 

 

 

곧은 소나무 빼곡한 저 길에 한 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나무를 좋아하오 나는.

저런 파격이 없다면 저 소나무 숲은 그림이 되지 않는 거요.

 

 

 

 

풍경을 완성하는 건 사람인가 보오. 지금까지 그걸 놓치고 살았소.

하지만 어쩌겠소. 평생 노래 부를 수 없는 벙어리 카나리아도 있는데.

 

 

 

 

장생포 일몰과 함께 시월의 끝자락을 보았소.

친구는 떠나고 나는 남았소. 언제나 그러하듯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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