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살아남을 확률은 0.1%도 안돼요. 1천 명에 한 명...나머지는 엑스트라죠. 저마다 자신이 주류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비주류.”
얼마 전 개인전을 열었던 T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
화실 가득 그림을 쌓아놓고도 그림을 소비하지 못하는 작가가 수두룩하다고.
아무리 못 받아도 호당 10만원은 받아야 하는데, 막상 그림 사갈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고 애써 그린 그림을 그냥 주고 싶지는 않다. 하나하나 자식들처럼 아까우니까.
글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시집이 하루에 수십 권인데 서점에서 가장 안 팔리는 게 시집이란다.
문학 장르 중에 시인의 숫자가 가장 많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저 잘난 맛에 쓴다는 얘기다. 남의 글은 안 읽는다는 얘기다.
자아도취가 자학보다는 낫지만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을, 그렇다고 붓을 놓을 수도 없는 자신을 돌아보며 쓸쓸한 화가.
누가 불러주는대로 쓰는 듯한 착각에 자판을 두들기지만 책이 팔리지 않는 작가.
비단 이 뿐일까. 세상에는 빛도 못 보고 살아가는 수많은 ‘마이너’들이 있다.
요는 그냥 사느냐, 살아남느냐다. 내가 좋아서 한다면 ‘사는 것’이 되고, 남과 비교하고 경쟁한다면 ‘살아남는 것’이 된다.
살 것이냐, 살아남을 것이냐는 프로와 아마의 차이처럼 엄청난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남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지도 모르고.
‘왜 쓰는가?’에 대한 갈등을 털어놓았을 때 C스님이 말씀하셨다.
“한 중생(衆生)을 보고도 보살이 오신답니다.”
기도가 간절하다면 한 사람의 중생을 보고도 보살이 강림하신다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 요는 간절함이고 진실함이지. 중생들은 너무 많은 걸 생각하고 걱정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준다면 보살 강림이나 다를 바 없는 거지, 수맣은 사람의 갈채를 받고 스타덤에 오르기만 바랄 것이냐.
아무 생각 없이 쓸 일이다. 쓴다는 일 자체에 미쳐서 쓸 일이다.
한 중생을 보고도 보살이 오신다는데...
<지난 해 '에세이 울산' 출범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