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느, 베니스, 베르린영화제와는 비교를 거부하는 산골영화제가 반구대 한실마을에서 열렸다.

반구대에서 산을 넘어 가 닿는 마을, 돌아나올 길 없는 막다른 마을에 150여 명의 관객이 모여들었다.

아침부터 오락가락하던 비가 영화 상영 도중에도 내려 주최측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실영화제를 생각해낸 사람은 '은행나무'라는 닉네임을 가진 신경정신과 의사.

그는 골수 한실사람으로, 사연댐 물 속에 잠긴 고향을 그리워하다 폐교된 대곡분교를 사들여 별장으로 쓰고 있다.

물 속으로 사라진 고향집 대신 문 닫은 학교를 옛집처럼 가꾸고 보살펴온 그에게 한실은 영혼의 안식처인지도 모른다.

 

 

 

 

 

 

손바닥만한 운동장 둘레에 50년생 은행나무들이 황금 갑옷을 입고 서 있는 곳, 그 운동장에 스크린이 펼쳐졌다.

영화는 <더폴(The fall)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2006년 개봉된 인도 영국 미국 합작영화다.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하지 않은 환타지영화로서 매니아들에게 호응이 높은 영화.

어린 시절 동네 가설무대에서 영화 보던 추억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여고시절 보강 특강 다 빼먹고 도둑영화 보러 다닌 내가 아니던가 ㅎㅎ

자동차극장의 영화관람과는 또다른 낭만, 밤하늘에 별만 떴더라면 금상첨화였을 걸...

 

 

 

 

 

 

식전행사로 무대공연이 있었고 본 영화(더폴) 상영 후 별채에서 불멸의 밤이 있었다.

젊은 영화감독들과 학생들은 영화 보고 토론하며 밤을 새우고, 나는 손님들과 술 마시며 민박집에서 밤을 새웠다.  

황토집 구들장은 아침부터 때놓은 장작불 덕분에 뜨끈뜨끈 비 맞은 우리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해개이가 공수해온 당진 연꽃막걸리는 사연 많은 해개이 인생처럼 눈물나게 향긋하고 알싸했다.

 

 

 

 

 

 

술꾼의 아들 / 산내 님

 

술은 즐기는 자, 달래는 자, 그리고 푸는 자의 음식이다.

술을 즐기는 자는 밥을 먹으며 마시고, 술로 달래는 자는 안주를 먹으며 마시고,

술로 푸는 자는 빈 속에 강술만 마신다 하시던 아버지는 주무시지 않는 한 언제나 술을 드셨다.

술을 즐기는지 달래는지 푸시는지는 몰랐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술을 드셨다.

술은 잘 배워야 한다. 한번도 대작을 해주시지 않았던 아버지 유언처럼 남기신 충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술이 맛있어질수록 술잔을 들 때마다 아버지 냄새가 난다.

제대로 술을 배우지 못한 나는 술을 즐기거나 달래거나 풀 줄도 모르면서 아버지처럼 매일 술을 마신다.

그 이유는 외롭고 슬프거나 기쁘거나 서러워서가 아니다.

그저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서러워할 수 없어서일 뿐이다.

아버지는 왜 술을 드세요?

아버지를 여의고도 스무 해가 지나도록 여쭤보지 못했던 그 대답이 사뭇 궁금해서 오늘도 나는 술을 마신다.

 

 

 

 

 

 

산골영화제 에피소드의 압권은 '술꾼의 아들'과 살고 있는 아내의 얘기.

UKO(유나이티드 코리안 오케스트라 / 난치병 어린이를 치료하고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교향악단) 단장인 그녀는

산골영화제 에피소드와 함께 '레드카펫'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얼마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대받았던 그녀는 산골영화제도 그 비슷한줄 알았다고 한다.

반구대를 지나 산을 넘어오는데 오른쪽 산비탈이 절벽이더란다. 순간 '뭔가 이상하다?'싶었다고.

국제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았던 그녀가 산골영화제의 현실을 깨닫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문 분야에서 각자 바쁜 부부인지라 남편(산내님)에게 보낸 영화제 초대장을 아내가 일일이 숙지할 수 없었던 게다.

 

 

 

 

 

잔치는 끝나고 손님들은 돌아가고 우리들은 남았다.

민박집 마당에 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가, 빗방울이 거세지면 방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렇게 밤을 새웠다.

영화에 취한 사람은 영화에 취하고, 사람에 취한 사람은 또 사람에 취하고...

세상사 그렇지 않은가. 똑 같아지라고 강요하지 말 일이다.

 

 

 

 

 

 

은행나무집도 적막에 잠겼다. 굵은 빗방울이 어둠을 무겁게 짓눌렀다.

뜨거운 국밥을 퍼주던 자원봉사자들과 향기로운 커피를 내려주던 바리스타와 수많은 스텝들은

방금 넘어간 추억의 한 페이지가 내내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그 그리움으로 내년 영화제를 기획할지도...

 

 

 

 

 

 

두어시간 눈 붙이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행여 새물안개가 피었을까?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한실은 희뿌연 운무 속에 휩싸여 편안한 늦잠에 빠져 있다.

어젯밤에 쳐둔 그물을 걷어 뭍으로 돌아오는 저 어부, 어망 가득 붕어나 잉어가 들어있겠지.

내 어망에는 산골영화제와, 먼길을 달려온 벗님들과, 푸르뫼 도반들의 마음이 가득 들어있다.

해개이가 밤새 되뇌었던 말 "이건 필시 숙세(宿世)의 인연인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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