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서 만난 연작 사진에 시선이 꽂혔다.
밭에서 일하다 말고 카메라 앞에 불려나온 초로의 여인들. 아마도 작가의 어머니거나 친척쯤 될까.
어정쩡하게 다리를 벌리고 섰거나 시무룩한 얼굴로 앞을 보는 모습이 전형적인 우리네 시골 아낙들이다.
빼어난 구도나 명암은 애초에 무시하고 다소 서툰듯 지극히 평범하게 찍은 사진이다.
대지는 아직 스산한 기운인데 매화 저 혼자 미친듯 피어있는 배경이 여인들의 표정과 사뭇 대조적인데다가
사진 아래 삐뚤 빼뚤 쓴 글씨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았다.
'내 나이 62세, 아직 봄은 오지 안았다.' ' 모든 꽃이 봄에 피는 것은 아니다.' 맞춤법도 맞지 않는 글이 가슴에 와 박혔다.
농촌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모델과 그들의 진솔한 심정을 나타낸 한 줄의 글 앞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아무도 눈길 주지않는 촌 아낙들, 평생 농투성이로 살아온 이들에게 봄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 인생에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는 글 속에 담긴 탄식과 희망을 읽었다.
평생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고생만 하다 육십 고개를 넘었지만, 그래도 아직 인생의 봄날이 남았다고 믿는 여인.
그녀가 원하는 봄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지나가버렸을 수도 있다.
칠순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는 모든 꽃이 봄에 피는 건 아니라고 눈물겹게 역설하고 있다.
눈코 뜰새없이 살다 어느새 생의 늦가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라는 얘기.
옛날같으면 벌써 뒷방 신세를 자처하며 지루한 여생을 보내고 있을 나이에 아직도 봄날을 기다린다니, 얼마나 어여쁜가.
사진만으로 다 전할 수 없는 메시지를 글 한줄로 적어넣은 작가의 발상이 신선하다.
머잖아 나도 저 나이가 될텐데 그때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봄은 벌써 가버렸다고 억울해 하지는 않을까.
지금도 나는 만시지탄에 빠질 때가 많은데. 플렛폼에 서기도 전에 기차가 스쳐 지나간 것처럼 안타깝고 억울하기만 한데.
이른 아침 수영장에 가면 아쿠아로빅을 즐기는 여자들을 많이 만난다.
수영보다 운동량이 적고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는 운동이라 육칠십대 여인들이 대부분이다.
젊은 강사는 수영장이 울리도록 음악을 켜놓고 물 밖에서 시범을 보이고, 여인들은 물 속에서 동작을 따라한다.
수영하는 틈틈이 나는 여인들의 율동을 훔쳐본다. 아니, 사실은 젊고 탱탱한 여강사의 섹시한 동작을 감상하는 건지도 모른다.
날렵한 허리 아래로 탄력있게 올라붙은 엉덩이 그리고 늘씬한 다리. 나도 한때는 저런 몸매였을 때가 있었던가.
마침 스피커에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가 신나게 흘러나오고 있다. 요즘 중장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대중가요.
물 속의 여인들은 합창하듯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를 목청껏 외친다.
군살이 두둑한 허리와 축 처진 엉덩이.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여인들은 항변하는 듯하다.
주름도 군살도 세월이 준 훈장인데, 이 훈장 달고 뭔들 못하리. 사랑이 청춘의 전유물이란 생각은 버려, 하고 외치는 듯하다.
물 속의 그녀들보다 내가 족히 십년 아니 그 이상 젊을텐데 마음이 겉늙은 탓인지 '내 나이가 어때서'가 안 된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는 커녕 모든 것에 심드렁하고 의욕이 없다. 정신은 산만하고 육체는 피곤하며 매사에 시니컬하다.
모든 것에 관심이 많고 열정적인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도 혹시 나처럼 겉으로만 명랑 쾌활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충 잘 살고 있는 척, 보편적인 중년인 척,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처럼.
그러나 돌아서면 끝없이 헛헛한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내가 있다.
나는 낡아가는 게 점점 두려운 건 아닐까.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지만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을 무언가를 찾고 싶다.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떠나 나를 나답게 표현하는 그 무엇. 내 인생의 새로운 봄을 만나기 위한 준비작업.
누군가에겐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사진이나 글일 수 있지 않겠나.
갤러리에서 만난 촌로들의 사진에서 나는 멋진 힌트를 얻었다. 사유와 감성이 깃든 사진에 글 입히기.
그리하여 누군가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할머니들의 사진에 감정의 파동을 느꼈듯이.
삭막한 세상 건너가며 누군가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것도 아름답지 아니한가.
자랄 때부터 나는 상상력이 풍부했다. 머리속에 샘솟는 이야기들을 만화로 그려보기도 하고 글로 풀어놓기도 했다.
그 오랜 습관을 못 고쳐서인지 이순을 눈 앞에 두고도 글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동안 책을 읽지 못하면 금단현상이 오는 느낌, 신문이든 잡지든 읽을거리가 눈앞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현상.
그래서 글은 평생 나를 치유하고 위무하는 자위기구였다.
이제 번득이는 영감(靈感)이 사라진 대신 사유의 깊이가 더해지는 나이를 어떻게 갈무리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사진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내일도 카메라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에 나만의 사유를 입히고 싶다.
노래를 좋아한다고 누구나 가수가 되는 건 아니듯이 사진을 좋아한다고 해서 사진가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한 장의 사진에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을 붙여넣기 해보고 싶다.
그래서 뭐할건데?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도 되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무엇으로 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