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구방마루
물안개 피는 물치항에서 일출을 기다린다.
5시간 넘게 차를 달려 대청봉이 보이는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 지난 밤을 보냈다.
서쪽 하늘 멀리 눈 덮인 대청봉이 선명하게 보이는 곳, 설악산 둔전계곡.
큰 산 발치에 쉬러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았던가.
겨울 설악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무릎 수술 이후 한동안 소원했던 님을 만나니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
허둥지둥 달려가 왈칵 안아보고 만져보고 쓸어보고 뜨거운 키쓰를 퍼부어주고 싶다.
단풍으로 유명한 주전골의 겨울은 고즈넉하다.
몇 년 전의 수해로 계곡의 풍광이 많이 변했지만 기암절벽은 여전히 위풍당당하다.
설악에 들 때마다 안정이 안 되는 건 왜일까?
우쭐우쭐 춤추는 암봉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던 설악의 첫 인상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용이 살았다는 폭포도 얼어붙어 전설을 무색하게 한다.
흘림골로 올라가고 싶었는데 동계장비가 없는 일행들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생각지도 않은 인연이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듯이, 또 어떤 인연이 나를 끌고 갈 것인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자리마다 폐허일지라도, 폐허 속에 꽃 피는 동안은 행복했으니.
실컷 놀다 들어오면 떡 벌어지게 한 상 차려져 있고, 마음껏 놀다 들어오면 또 한 상 차려져 있는
내 생전에 이런 호사는 처음이리라. 사 먹는 밥이야 돈으로 해결되지만 구방마루의 2박3일은 돈으로도 살수 없는 칙사 대접이었다.
멧돼지 구이나 한방 백숙같은 메인 요리는 물론이고 밑반찬 하나하나 정성으로 버무린 것들이었다.
곤드레나물밥에 양미리 조림 등 강원도 특유의 식단으로 20여명의 입을 즐겁게 해준 구방 언니가 존경스럽다.
권금성에서 보는 만물상과 그 넘어 공룡능선의 마루금.
더 오른쪽으로 가면 마등령, 저항령, 황철봉... 눈으로만 더듬어도 행복하다.
구방언니가 서울(삼성동)에서 둔전리로 들어오기까지의 사연은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도회지 생활을 접고 산골로 들어온 이들이 현지에 적응하기까지엔 진입 장벽이 꽤 높았으리라.
한약재 넣은 백숙을 무료로 드시라고 해도 마을 사람들이 집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니...
컴플렉스가 많은 사람들일수록 방어적이고 폐쇄적이다. 텃세 부리는 촌 사람들이 그 전형이다.
설악의 연봉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저 울산바위처럼 그런 사람들은 외롭다.
눈이 부드럽다고? 눈이 포근하다고?
짓밟지 마라 / 저 빛나는 살의 / 너를 쓰러트리리라.
<강경호 '눈'>
아들 어렸을 때 눈을 보러 권금성까지 갔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녀석은 눈을 뭉치더니 집에 가져가겠다고 떼를 썼는데...
두번째 일출은 낙산사에서.
카렌다 그림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을 나도 찍어본다.
설악동에서 올려다 본...
아침 햇살이 온화하게 감싸고 있는 홍련암.
평범하고 흔한 풍경이지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다는 것이 소중하다.
나에겐 그대가 그렇다. 나도 그대에게 그랬으면 좋겠다.
둔전계곡 입구에 있는 진전사지 3층석탑.
이틀 밤을 묵은 물빛하늘펜션.구방마루 뒷집.
저 멀리 하늘 끝에 대청봉이 보인다.
<물지천에서 보는 대청봉 / 사진: 옹까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