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외로웠겠군요.”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있지.”

영화 ‘색,계’를 보고 나서 뇌리에 깊이 박힌 두 주인공의 대사.


끝없는 의심과 경계 속에서 그 남자는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리.

내면의 뜨거움을 싸늘하게 포장하고 냉혹한 얼굴로 살아온 ‘리’(양조위)

마음으로 그리던 남자를 두고 몸의 사랑을 택한 ‘왕치아즈’(탕웨이)

불행이 예고된 두 사람의 사랑은 격정적인 정사 씬을 통해 관객을 설득한다.

숱한 스파이 영화처럼 원수를 사랑해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은 비슷하나

인간 내면의 감정을 눈빛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연기력이 대단하다.

1940년대 일제 치하의 상해를 재현해낸 세트도 이안 감독의 특출한 능력이겠고.

영화의 압권은 역시 양조위의 그 사려 깊은 눈빛.

차갑게 고뇌하는, 뜨겁게 열망하는, 외로움을 난폭하게 견디는...

사랑 앞에 무너진 ‘왕치아즈’를 죽음으로 보내고 쓸쓸히 집에 들어와

그 여자가 쓰던 방에서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는 마지막 장면이 가슴을 울린다.


그 남자처럼 외로워야 오래 살아남는다.

외롭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 애쓰다가 결국 무너진다.

아무에게도 내 상처를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도 외롭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오래 살아남는다.

영화를 통해 그런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11월15일 이후 하루도 집에서 점심을 먹은 날이 없었다.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사람, 꼭 찍어 불러내서 매일 외식했다.

엊그제는 진수처럼 고3을 둔 시내 후배를 불러내서 함께 밥 먹고 쇼핑하고

우리 동네로 들어와 차 마신 뒤 해가 뉘엿해서야 돌려보냈다.

수험생을 둔 서로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할 얘기가 그만큼 많다.

올해 울산 고3들이 수능 성적이 잘 안 나왔다는...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내려가서 지망 대학에 탈락할지도 모르는...

아들 말마따나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는데... 참 심란하다.

꼴에 나도 수험생 엄마라고 눈만 뜨면 아들 걱정이 된다.

제발 재수는 안 해야 할 텐데.


심란해서 집에 있기가 싫으니 매일 밖에 나간다. 이럴 때는 운동이 약이다.

그러나 아이스링크는 다음 달 초에 공연하는 러시아발레단 공연 준비로

개장폐업 상태가 아닌가. 스케이팅을 못한 지 열흘이 넘었다.

아침 산에 갔다 와서 전화를 건다. 마음 편한 사람 불러내서 점심 먹고 수다 떤다.

일주일 넘게 불러내고 나니 이젠 불러낼 사람이 없어 오늘은 영화 보러 나갔다.

2시간40분짜리 영화가 왜 그리 짧게 느껴지는지. 몰입되는 영화는 완성도가 높다.


집에 오니 아들은 열심히 컴퓨터게임을 하고 있다. (저게 내가 낳은 거 맞어?)

수능 끝나고 코가 석자나 빠져있더니 사흘만에 핸드폰 사고 오늘은 볼링 쳤단다.

수능 스트레스로 여드름이 더 심해졌다며 병원에 피부관리 받으러 다닐 거란다.

살도 빼야 하니까 헬스클럽 회원권도 끊어 달라고 한다.

"너, 논술 준비 안하니?" 조심스럽게 말하면

"논술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아세요? 수능보다 범위가 넓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

속 타는 에미 심정도 모르고 남들은 나를 볼 때마다 그런다.

"엄마가 글을 잘 쓰니까 아들은 논술 걱정 안 하겠네요!"

(옘병할. 그런 거나 닮았으면 걱정을 안 하지.)

아무래도 내일이나 모레쯤 훌쩍 산으로 내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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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에서 색(色 lust)은 성적욕망을, 계(戒 caution)는 신중함을 뜻한다. 불안정한 시대일수록 파편적인 사랑이 주를 이루지만 넘치는 건 모자람 만 못하다는 말처럼, 넘치는 에로스의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고 사랑에 깊이 빠져든 주인공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잠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고 동물적인 생존본능만이 남아있는 남자에게 사랑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구원인지도 모른다.

일본 장수를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조선의 논개처럼, 젊음과 열정을 간직한 여대생 왕치아즈(탕웨이)는 민족의 배신자 이 선생(왕가위)을 유혹해 없애버린다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그녀의 거룩한 분노와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지 못했다. 수많은 동족을 살상한 살인마는 예상과 달리 부드러운 음성을 지닌 왜소한 중년의 평범한 남자였던 것이다. 그는 차 한 잔의 대화를 기꺼이 즐길 줄 알고, 명나라 희곡에 실린 천애가녀라는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릴 만큼 감성적이었다. 연극의 예술적 매력에 빠져있던 왕치아즈는 이 선생을 죽일 수 없는 이유들에 점점 설득당하기 시작한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심리기전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한다. 사랑하기에 떠난다거나, 사무치게 그립기에 원망한다는 그런 심리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로, 이 선생이 스쳐간 여인을 잊지 못하고, 3년 후 재회했을 때, 여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옷을 찢으며 분노에 찬 성행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생각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고 서로 감시하며 살아남아야하는 암울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개인이 어떻게 희생돼가는 가를 보여준다.

사회체제를 떠나서 섹스, 사랑, 권력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의미가 큰 주제들이다. 권력도 사랑도 모든 부조리를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 이안 감독이 가장 강조했던 사랑과 고통은 공존한다.는 메시지처럼, 인간은 어둠과 밝음,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와 에로스(성적 욕구)가 공존하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김성미(마음과마음정신과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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