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모르고 핀 꽃을 탓할 일은 아니다.
 삭막한 계절에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존재가 고먀울 뿐
세상에 철없는 것들이 어디 너희 뿐이겠니?

 
 

교사로 퇴직한 지인이 모임에 나오지 않은 지 2년이 넘었다.
인생 이모작을 외치던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궁금해 하던 친구들이 뒷전에서 슬슬 빈정대기 시작했다.
“둘이 연금 합치면 칠백만 원이나 될낀데, 나와서 밥도 좀 사고 그카지, 꼭꼭 숨어서 뭐하는 기고? 해외여행 다니나?”
직장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일 년에 한두 번 만나기 어려웠던 친구였지만 이렇게 오래 못 본 건 처음이다. 혹시 몹쓸 병에 걸렸나? 오래 앓아누운 건 아닐까? 전화를 해도 요리조리 피하고, 어쩌다 통화를 해도 심드렁한 것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교외에 자리한 전원주택으로 그녀를 찾아간 건 지난 가을이었다. 단풍놀이 갔다 잠시 들른 것처럼 위장하고 그녀의 집을 급습했다. 담장에 장미넝쿨을 올린 그들의 집은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모두 내 욕 많이 했지? 귀가 간지럽더라.”
시니컬하게 웃으며 그녀가 털어놓는 얘기에 울지도 웃지도 못 하고 앉아있었다. 은퇴자들이 부러워하는 ‘고액 연금 수령자’ 부부가 생활비에 쫓긴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임에 나가 돈 쓸 형편이 안 된다는 게 엄살일 뿐일까?
그 집 아이들은 둘 다 해외유학파다. 심지어 큰아들은 MBA 출신이다. 교육자 집안 애들이라 공부 하나는 똑 소리나게 잘한다고들 부러워했다.
 
문제는 국내에 그들이 취업할만한 회사가 없다는 거였다. 취업은 쉬운데 6개월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국내 기업들의 경영 방식이 마음에 안 들고, 연봉이 마음에 안 들고, 조직 문화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아들들이 원하는 회사는 적어도 나스닥 시총 10위 안에 드는 기업이라나.
“눈을 좀 낮춰서 취업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듣네. 지금까지 공부한 게 아깝다고.....”
낮게 한숨을 쉰다. 미국 유학까지 보내줬으면 그만이지 아직도 아들을 끼고 사냐고 다그쳤더니 대답이 압권이다. 둘이 연금 받아서 애들 생활비 대줘야 한다고. 홀로서기 할 때까지 부모가 뒷바라지 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애들한테 매월 수백 만 원씩 부쳐야 하니 우리가 쓸 돈이 없네. 그동안 모아둔 걸로 근근이 버텼는데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인생 이모작은 꿈이었나봐.”
그들이 시골집에 들어앉은 이유는 자녀 리스크 때문이었다. 30년 넘게 일한 대가로 남들보다 두둑한 연금을 받게 됐지만 자식 앞에서 공든 탑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 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중에서>
 


경사보다 애사가 많은 나이가 되었는데도 가끔 결혼식에 갈 일이 있다. 지난 연말엔 오랜 지기의 장남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한 부모 가정이라 하객 걱정을 하기에 2시간을 운전해 결혼식에 참석했다. 비혼이 유행인 시대에 결혼이라니, 그 집 아들이 고맙고 대견했다.
그러나 기뻐야 할 결혼식 내내 혼주의 얼굴이 어딘지 어둡고 불안해 보였다. 더군다나 가족석에 있어야 할 작은 아들 내외가 보이지 않았다. 우는 듯 웃는 그녀와 눈만 맞추고 아무 것도 묻지 못한 채 돌아왔는데 그날 저녁 전화가 걸려왔다.

“작은 아들이 또 사고를 쳤어. 무면허로 운전하다 음주단속에 걸려 가중처벌 받게 생겼대. 지금 구치소에 있는데 징역 최하 3년 받겠다네..... ”
“세상에! 말도 안 된다. 애가 셋이나 있는 넘이 음주운전을? 그게 제 정신이야?”
제 정신 아닌 거 맞다. 그 아들은 어릴 때부터 천방지축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비행청소년으로 제 엄마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몇 년 전엔 졸음운전으로 지게차를 들이받아 일 년 가까이 침대에 누워 지내기도 했는데 제 엄마가 소 대변을 다 받아냈다. 며느리는 병원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애들이 어려서 업고 걸리고 병원 드나들 형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때 제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제 아내가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모르는 걸까. 사고 이후 불과 5년만에 음주운전으로 면허 취소 당하더니 이번엔 또 무면허로 음주 운전이라니.
형의 결혼식을 앞두고 대형 사고를 친 작은 아들 때문에 기쁜 날 혼주의 얼굴이 그토록 어두웠구나.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통곡하던 그 마음을 누가 알까?
“사돈한테 면목이 없어서 전화도 못 한다. 며느리가 과연 애들 키우며 옥바라지 하겠나? 내가 저한테 그리 정성을 다해도 본척만척, 어머님이 자식을 잘 못 키워서 그렇다고 원망하더니만.”

모범답안 같은 엄마 밑에서 어찌 저런 아들이 나왔나 싶게 광포한 삶을 살아온 아들, 목회자를 소망했던 형에 비해 정반대의 길을 걸어 마침내 폭망에 이르렀다. 그의 피 속을 돌던 광기가 아내와 아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양쪽 부모 가슴에 난도질을 하고 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한없이 주고 또 주고 진심으로 포용해도 내 것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자식일지라도.
 
<자식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루소(Rousseau) '에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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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주 만나는 여인이 있다.

가끔 카톡으로 '오늘 수업 맞아요?'하고 물어오는 86세 흰 머리 소녀.
'수업은 내일인데요. 오늘 목요일이잖아요.'
무안하지 않게 스마일 이모티콘을 함께 보내면 다시 회신이 온다.
'내가 가끔 인지 장애가 오나봐. 날짜나 요일을 헷갈려.'
'지극히 정상입니다. 저도 헷갈릴 때가 많은 걸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지만 속으로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니.
 
처음 기타교실에서 그녀를 보고 기겁하듯이 놀랐다.
구부정한 허리로 지팡이를 짚고 나와 기타를 치는 흰 머리 소녀.
그녀는 작년에 고관절 수술을 받고 이제 막 1년이 지났다고 했다.
집에 누워 지내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 기타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젊은 시절 클래식 기타를 접했다고 한다.
직장 때문에 바빠서 계속하지 못한 기타를 뒤늦게라도 쳐보기로 했다고.
진지하게 악보를 보며 연주하는 그녀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평균연령 50대의 기타교실 회원들 속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기타를 배우는 그녀
나는 나이 때문에 기타교실 나가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는데
그녀는 나이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와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고관절 수술하기 전까지 손수 운전을 하고 다녔던 그녀는 기동성이 제일 아쉬운 부분이란다.
스마트폰에 택시 앱을 깔아놓고 기타교실 오는 날은 그걸 이용한다기에
"가실 땐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저희 집도 같은 방향이거든요."
자연스럽게 그녀와 나는 기타교실 단짝이 되었다.
"오늘 택시비 굳었으니까 언니가 밥 살게."
그러면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한다. 때론 집에 올라가 차를 마시기도 한다.
좀 적적하신가 싶어 기꺼이 따라가는 편이다.
이층 계단이 불편할 텐데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계단을 오른다.
하루에 만 보를 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요즘 칠팔천 보 정도는 걷는다고.
 
거실 벽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자격증, 표창창, 훈장 등이 그녀의 일생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역 여성계의 리더로 불리며 평생 현역으로 살아온 그녀는
팔십대에 이르러 시 낭송과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모양이다.
시 낭송은 개인지도를 받아 무대에 설 정도가 됐고, 기타는 나처럼 초급을 막 벗어난 실력 같다.
내후년에 미수(米壽) 기념으로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그녀는
얼마전 나에게 그룹사운드 활동을 권하기도 했다.
색소폰, 건반, 드럼까지 갖춘 밴드가 있는데 기타로 합류하자는 제안이었다.
실력도 안 되지만 이 나이에 무슨 밴드? 하고 기겁을 했는데
그녀는 요즘 그 밴드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거였다.
내가 아는 그 밴드는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그룹인데 86살에 그룹사운드라니
용기가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밴드에서는 대우 차원에서 그녀를 받아들였겠지만
남의 시선이나 고정관념 따위 가볍게 물리치고 사는 그녀가 눈부시게 부러웠다.
누군가에겐 극성으로 비치기도 하겠지만 주관이 뚜렷한 삶을 사는 그녀가 얼마나 멋진가.
 
미국의 조지 도슨이라는 사람은 101세 나이에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책을 출판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자신이 문맹임을 비밀로 하기 위해 한국전쟁 당시 해군으로 복무하면서도
가족들에게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98세 되던 해 성인들을 위한 문자 교육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틀 만에 영어 알파벳을 모두 외어버렸다고 한다.
뒤늦게 글을 배운 도슨은 물 만난 고기처럼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해 마침내 자서전까지 내게 된 것이다.
'당신은 나이만큼 늙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만큼 늙는다.'
조지 도슨이 남긴 이 말은 세계적인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나의 기타 파트너 흰 머리 소녀의 나이는 아마도 20대? 아니면 30대?
하긴 나이가 무슨 소용일까. 달력 나이는 그녀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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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 예전에는 신지 않았고 지금은 신지 못 한다.
탈렌트 K씨는 팔십대에도 하이힐을 신는다고 자랑하는데 나는 삼십대에도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
전족에 가까운 고통을 겪으면서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싶지 않았고

각선미와 무관한 몸매가 하이힐로 달라지겠나 싶었다.

좀 불편해도 외모에 투자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지만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랴.
실제로 하이힐을 신으면 엉덩이가 살짝 올라가 체형이 보정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소위 애플힙이라는 섹시하고 아름다운 엉덩이로 보인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런지 패션계에서는 모델들이 런웨이를 걸을 때 반드시 하이힐을 신는 게 불문율이다..
 
하이힐을 신고 자신만만하게 걸어가는 여성들을 볼 때마다 나는 눈길이 절로 간다.
부러움을 넘어 감탄 혹은 경탄, 시야에서 여인이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쳐다본다.
혹시 넘어지지 않을까, 구두 굽이 부러지진 않을까,

일면식도 없는 여인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보다가 흠칫 놀라기도 한다.
나는 하이힐 공포증이 있다. 하이힐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트라우마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까닭을 얘기하기가 너무 가슴 아프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지금쯤 얘기할 수 있겠다.
 
나보다 십 년쯤 먼저 결혼한 친구가 외동딸 하나를 두고 살았다.
엄마가 워낙 동안인지라 딸과 함께 다니면 자매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딸이 학교 다닐 때는 물론이고 대학 졸업 후에도 직장 근처까지 데려다 줄 정도로 사랑이 지극했다.
속담처럼 ‘쥐면 꺼질까 불면 날까’, 딸은 공주처럼 키워야 시집가서도 귀한 대접 받는다는 지론이었다.
“우리 딸 너무 아까워서 시집 못 보내겠어. 그냥 우리가 데리고 살까봐.”
친구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에게 주긴 아깝다는 거였다. 친구도 그 남편도 ‘딸바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입살이 보살될라. 자식을 평생 끼고 살 거야?’ 넌지시 찔러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아까운 딸을 멀리 보낼 수가 없어서 직장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택했는데
육교 하나만 건너면 10분 만에 닿는 사무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딸이 비 오는 날 그 육교에서 사고를 당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 했다.
하이힐을 신고 레이스 달린 우산을 쓰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구두 굽이 계단 끝에 걸려버린 모양,
중심을 잃은 공주는 순식간에 계단에서 굴러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행인들의 신고로 구급차에 실려 간 공주는 복합 골절로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한다는 판정을 받고 말았다.
“나 때문이야. 내가 그날 우리 딸을 데리러 갔어야 했는데. 내가 죄인이야.”
“내가 차로 데려다 줄걸. 비 오는 날 왜 걸어서 출근하게 했을까!”
세 식구가 모두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괴로워하던 어느 날, 소름끼치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공주가 그만 지구를 떠나버린 것이다. 평생 휠체어에 앉아서 살기 싫다는 유서를 남기고.
 
딸만 바라보며 살던 두 부부는 몇 달 동안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고 이웃을 만나지도 않았다.
남편은 직장에 병가를 내고 쉬었다. 같은 아파트 통로에서도 그들의 기척을 듣기 어려웠다.
그런 날들이 6개월쯤 흐른 뒤 부부는 아주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심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니는 모양이었다.
이웃들은 내심 걱정과 위로를 담아 먼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딸을 잃은 상실감에 괴로워하던 그 집 남편이 끝내 세상을 등져버린 것이다.
그동안 심한 우울과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한 순간 잘못된 선택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미쳤어. 왜 지가 죽어? 남편이 아내를 보호하고 지켜줘야지, 무책임하게 왜 죽어?”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화가 나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자식 때문에 병을 얻었다 한들 남은 가족 생각을 해야 하지 않나?
아내 혼자 남아서 그 큰 상처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무책임하게 혼자 떠난단 말인가?
친구는 종적을 감추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무도 몰래 집을 처분하고 어디론가 떠났는데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고 지낸다.
손전화도 버렸는지 카톡도 문자도 안 받는다.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모든 인연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해외로 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그녀의 이름을 인터넷 검색창에 넣어본다. 혹시 작은 생활 반응이라도 잡힐까 싶어서.
잡히기만 해봐라 싶지만 사실 그녀를 찾은들 뭐라고 위로한단 말인가. 그저 말없이 바라보다 돌아오고 말 것을.
자식과 지아비를 한꺼번에 잃은 여인에게 어떤 말인들 도움이 될까.
 
이젠 그 친구를 놓아줄 때가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쥐죽은 듯 숨쉬고 있을 그녀에게 아는 척하지 않는 게 큰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불행을 섣불리 위로하려고 들지 말자. 섣불리 공감하는 척하지 말자.

그녀에게, 또 다른 그와 그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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