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지기 친구가 모처럼 전화를 걸어왔다.
알고지낸 세월은 오래지만 자주 만나 소식 주고받는 사이는 아닌, 이성이지만 동성 같이 편안한 친구.
“몸은 좀 어때?”
나의 첫 질문은 언제나 건강이다.
6년 전 그는 뇌수종으로 개두술(術)을 받았고 이후 여러 가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귀에선 하루 종일 매미 우는 소리가 나고 밤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몸을 혹사해서 잠을 달게 자보려고 하루에 두 시간씩 걸었더니 척추에 무리가 왔다고 한다.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는데 효력이 열흘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소연한다.
“당뇨가 있어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좀 걸었더니 허리가 망가지고.... 이제 죽는 일만 남았어.
우리나라도 안락사 허용했음 좋겠어. 난 지금 죽어도 호상이야.”
농 반 진 반 한숨을 섞어 말하는 투가 진지하고 무겁다.
 
얼마 전 모임에서 얼핏 본 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벗겨진 머리는 베레모로 감추었지만 만삭처럼 부른 배는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걸을 때마다 한쪽 다리를 약간 절뚝거린다.
가볍고 활기차게 걷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기우뚱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30년전 내가 알던 그는 눈빛이 반짝이는 카리스마 작렬의 상남자였다.
대졸 공채로 대기업에 입사해 승승장구 회사에서 가장 젊은 임원이 되기도 했는데.
그가 승진했을 땐 창사 이래 가장 많은 화환을 받았을 만큼 조직생활을 잘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그는 50대 중반 인생의 정점에서 곤두박질쳤다.
회사가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임원들이 대표적인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년을 5년이나 남겨놓고서.
정말 치열하게 살았는데, 회사를 위해 몸 바치는 정신으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쫓겨난 그는 여기 저기 떠돌았다.
모두들 근무를 꺼리는 해외지사 근무도 지원해보고 그가 부리던 하청업체에 고개 숙이고 들어가 일하기도 했다.
직장생활 틈틈이 산에 다니며 백두대간 팀을 이끌기도 했던 그는 점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가더니
나중엔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두개골 여는 수술을 받고 나더니 그는 기가 빠진 사람처럼 변해갔다.
 
와이프는 새벽기도부터 시작해 하루종일 교회 일로 바쁘고, 그는 늘 혼자 지낸다.
아내와 하루에 밥 한끼 함께 먹기가 어렵다.
둘이 살면서도 각자도생. 당뇨식을 하는데다 아내와 식성도 달라 반찬을 각자 만들어 먹는다.
현직에 있을 때 자주 만나던 사람들도 관계가 점점 뜸해지더니 어느 날부터 전화도 없고,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주변정리가 되더라고 한다.
“그 흔한 카톡도 없고, 전화 주고받는 사람도 없어졌네. 통화내역을 살펴보니 오늘 전화가 2주일만이네.
2주 동안 아무하고도 통화를 안했나봐.”
“기다리지 말고 먼저 전화해보지. 생각나는 대로 카톡도 보내보고.”
“그래야 되는데..... 매사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네. 귀찮기도 하고.”
한숨을 푹 쉬며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몸이 약해지니 정신력도 약해진 걸까.
“내 전화 받아줘서 고마워. 편하게 전화할 상대가 있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되네. 컨디션 돌아오면 차 한 잔 하자구~”
전화를 끊고 한참 생각에 잠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늙어가는 과정인 것같아 씁쓸하다.
60대 중반에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사람이 있나하면, 강골 체질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도 한다.
 
대체로 60고개를 넘어서면 한풀 꺾이는 게 아닌가 싶다.
회원이 수백명이나 되는 동갑내기 밴드에도 언제부턴가 새 글 올라오는 게 뜸해졌다.
업어온 글이라도 이따금 올라오더니 그마저 시들해졌는지 모두들 눈팅만 한다.
늘 그날이 그날 같으니 새로운 소식도 없고 사는 게 지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심드렁하긴 마찬가지.
가족 아닌 사람과 2주일 만에 통화한다는 친구야. 우리 다 이렇게 늙어가나 보다.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너나없이 밟는 코스 아닐까. 나도 하루 종일 히키코모리처럼 지낼 때가 있거든.
사람이 그리우면서도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그 심정 나는 알고도 남겠어.
이렇게 외로움을 견디고 고독에 무뎌지면서 우린 낡아가는 거겠지.
애써 익어간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위안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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