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다니길 좋아한다. 혼자 여행하고 혼자 사진 찍고 혼자 걷길 좋아한다.

운동도 혼자 할 수 있는 수영과 요가를 즐긴다. 파트너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운동이 더 익숙하고 편하다.

무리지어 다니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번거로운 것보다 좀 외로운 게 낫다 싶어서 혼자를 즐기는 편이다.

아들 어릴 때는 혼자 크는 녀석이 안쓰러워 온 동네 애들 다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가족여행도 많이 다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깨달았다. 남편도 아들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동안 나에게 억지로 끌려다녔다는 것을.

운전대만 잡으면 졸고 멀미가 심해서 배도 못 타는 남편과 호캉스 체질인 아들에 비해

나는 호기심천국이라  여기 저기 헤매고 다닌다.

내 딴엔 그게 세상공부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두 남자에겐 억지춘향이었던 거다.

 

이순에 접어들며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은 ‘한 달에 한 번 이상 장거리여행’이었다.

당일치기는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1박 이상은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식구에게 동의를 구한다 ‘나, 이번엔 어디어디 가고 싶어. 같이 갈래요?’하면

백발백중 ‘혼자 갔다와.’ 대답이 돌아온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건 내 나름의 예의다.

봄 가을에 나는 섬 여행을 주로 다니는 편인데 올해는 서쪽 바다 백령도, 대청도, 어청도까지 갔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1회성이지만 때로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 불문, 남녀 불문 대화가 통하고 정서적인 공감대가 있는 사람.

말 몇 마디 나눠보면 생각과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사람. 어청도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물 맑기가 거울같아서 붙은 이름 어청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대도 있다.

제3공화국의 2인자 김종필이 1963년 전북 금산군을 충남에 주고, 어청도는 전라도에 주는

물물교환(?)을 밀어붙여 가까운 대천항 놔두고 군산항에서 배를 타야 하는 섬.

하지만 그 배편도 군산에서 하루에 딱 한번이고 출항시간도 들쭉 날쭉이라 마음 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이 더 들면 영원히 못 가볼지도 몰라서 억지를 부려본 게 올해다. 

 

군산항에서 뱃길로 2시간, 어청도등대는 과연 훤칠하고 눈부셨다.

마을 안쪽에서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30분쯤 오르니 헌헌장부 같은 그 등대가 나타났다.

들머리의 돌담을 따라 입구에서 안쪽으로 조금씩 좁아지다가 마침내 느낌표처럼 우뚝 서 있던 돌올한 모습.

하얀 옷에 빨간 모자를 쓰고 특이하게도 등탑 윗부분은 한옥의 서까래처럼 꾸며졌다.

일제강점기(1912년)에 대륙진출의 야망을 가진 일본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어청도등대는 백 년이 넘은 역사와 함께 기암절벽 위에 앉은 모습이며 주변 풍광이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서해안 남북항로를 이용하는 선박들의 길잡이로 우뚝 서있는 등대에 홀딱 반했다.

보고 또 보고 찍고 또 찍고 등대에 심취해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혼자 오셨어요?’

나이는 50대 중후반? 활달하고 명랑해보이는 여인, 그리고 그녀에겐 짝이 있었다.

매달 한 번씩 섬 여행을 함께 하는 파트너라고 했다. 지난달엔 외연도를, 다음 달엔  연평도를 갈 예정이란다.

그녀는 조류에 관심이 많아 숲에서 울고 있는 새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었고

파트너는 식생(植生)에 조애가 깊어서 서로 이야기가 통했다.

어청도는 새들이 쉬어가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올해는 기류 변화로 새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여행의 묘미는 풍경과 함께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어청도 여행이 딱 그랬다.

등대에서 헤어진 우리는 각자 방식대로 섬 투어를 끝내고 저물녘 부두에서 만났다.

나는 섬 능선을 타고 동쪽 해안으로 트레킹을, 그들은 서쪽 해안을 돌아 마을길로 접어드는 코스를.

함께 가자는 말도, 따로 가자는 말도 필요 없었다.

권유도 강요도 필요없는 자유로운 영혼은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자 덕목이기도 하다.

저물녘 부둣가에 앉아 우럭 회를 안주로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여행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보니 끊임없이 소재가 흘러나왔다.

각자 좋았던 여행지를 추천하기도 하고 언젠가 먼 섬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숲 근처에선 휘파람새가 울어대고 우리는 술이 모자란다고 울어대고.... 그렇게 그 밤이 지나갔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자리를 함께한 시간들이 무척 즐거웠다. 다시 만날 수 없다 해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은 복된 인연이랄까.

며칠 후 카톡으로 그녀가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등대를 향해 걸어가는 내 뒷모습.

나는 카톡 프사를 그 사진으로 바꾸고 말았다. 한동안 그 사진을 다시 바꾸지 못할 것 같다.

'名色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돈  (0) 2023.01.05
코마(coma)  (0) 2022.08.30
신발을 위한 사색  (0) 2022.04.26
여인과 바다  (0) 2022.03.25
명자꽃  (0) 2022.01.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