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길가에 못 보던 빵틀이 등장했다.
바람 막아줄 비닐 포장도 없이 달랑 빵틀 하나, 거기 60대 후반의 남자가 털모자를 눌러쓰고 국화빵을 굽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빵틀 아래 LPG가스통이 있고 양은 주전자에 담긴 풀빵 재료와 팥소도 곁에 있다.
‘3개 천원, 7개 이천원’이라고 쓴 종이와 은행 계좌번호, 바로 옆에 돈통이 자리잡고 있다.
내가 못 본 사이 언제 신장개업을 했지?
일방통행 도로 한켠에 자리잡은 빵틀이 신기해 오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호기심이 발동해 나도 그 앞에 발을 멈추고 말았다.
빵틀 옆에는 갓 구운 국화빵 몇 개가 나란히 서있고, 빵틀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빵이 익어가고 있다.
남자는 빵을 뒤집느라 여념이 없다. 보아하니 장사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다.
 
걸쭉한 밀가루 반죽을 빵틀에 붓고 반쯤 익으면 팥소를 넣고 다시 반죽을 위에 부어 마무리.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갈고리로 잽싸게 국화빵을 뒤집어 완성, 그런데 어쩐지 솜씨가 선수 같지가 않다.
풀빵은 뒤집기에서 완성도가 판가름나는데 빵이 덜 익었을 때 뒤집으면 찢어져 못쓰게 된다.
반대로 너무 익은 뒤에 뒤집으면 탄내가 나서 실패다.
“여기서 먹고 가도 돼요?”
기왕이면 따끈따끈한 풀빵이 먹고 싶어 말을 걸었다. 남자는 빵틀에 눈을 둔 채 대답했다.
“그러세요.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고개를 드는 순간 눈이 마주치면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았다.
“어머나, 소장님.... 여기서....”
깜짝 놀란 나에 비해 남자는 모든 걸 각오한 듯 눈을 내리깔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오래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이제 한 달 됐네요. 마음 내려놓은 지는 오래됩니다.”
중앙시장 이불집 아들로 통하던 그는 지역 사회에서 얼굴이 꽤 알려진 인물이다.
국내 유수의 대학을 나와 수 십 년간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 지역 일간지에 가끔 칼럼도 실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아흔넷에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제가 모시고 살았지요. 아들 셋은 다 나가 살아요.
한 넘은 미국으로, 한 넘은 서울로, 제일 모자란 넘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아내 얘길 안 하는 걸로 봐선 먼저 보냈거나 헤어졌을까? 
“여기가 내 다섯 살 때부터 살던 곳이에요. 어머니가 번 돈으로 땅을 샀고 제가 설계해서 건물을 지었죠.
한때 번화했던 곳인데 점점 몰락해가네요.”
그의 빵틀이 자리잡은 곳은 그러니까 그의 집 현관 입구였던 것이다. 그는 이른바 건물주라는 사실.
1층 가게는 일식집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임대’ 종이가 붙어있는 걸로 봐선 폐업 수순을 밟고 있는 듯하다.
“이 동네 전부 아는 사람들이에요. 자랄 때 이웃에 살던 분들이라 나쁜 짓은 생각도 못해요.”
 
구도심 건물 한 채가 자신의 노후 대책이 될 줄 알았는데 문제는 경기가 갈수록 내리막이라는 사실,
상권이 신도시로 빠져나간다는 사실. 그는 여태 그걸 간과하고 있었던 거였다.
열심히 일하고 부모 봉양하며 애들 공부시키느라 재테크 감각을 놓쳤던 것일까.
아니면 나고 자란 곳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일까.
“이삼층은 누가 쓰고 있어요? 원룸이에요?”
“4층 건물 모두 제가 씁니다. 2층은 작업실, 3층은 서재, 4층은 주거 공간 하하하”
구차하게 임대 놓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자신이 다 쓴다고, 건물 관리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차라리 풀빵 장사가 마음 편하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는 거리로 나오기 전 1년 가까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고 한다.
자존심이 그를 흔들었고 외로움이 그를 보챘다.
유령 같은 건물에 갇혀 바둑이나 두고 책이나 읽는 것보다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생활전선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게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다.

앉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고심하던 끝에 그는 마침내 풀빵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단골 40% 뜨내기 60%면 성공한 거라는데 저는 단골 60%니 대박이죠?”
 
그는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팥 삶는 솥을 3개나 사서 걸어놓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해 그는 최상의 팥소를 고안했다고 한다.
흔히 사용하는 깡통 팥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든 팥소를 사용하니 손님들 호응이 폭발적이라고 한다.
가끔 여중생들이 빵틀을 기웃거리면 돈도 안 받고 국화빵을 건네기도 한다.
“쟤들이 성장기라 돌아서면 배고플 때잖아요. 요즘은 밥 굶는 애들이사 없겠지만 풀빵도 못 사먹는 애들이 있거든요.”
빵틀 앞에 서서 뜨거운 국화빵을 먹는 사이 여러 사람이 빵을 사 갔다.
오후 2시부터 준비한 재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그는 빵을 굽는다.
어떤 날은 두 시간 만에 재료가 동나고 어떤 날은 늦게까지 남아있다.
오후 몇 시간 장사를 위해 집에서 준비하는 시간이 더 많이 들지만 아직은 ‘젊어서’할 만하다고 한다.
 
야금야금 일곱 개의 국화빵을 다 먹고 빵틀 앞을 떠날 때가 됐다.
내 생전 국화빵을 한 자리에서 일곱 개나 먹어본 건 처음이다.
그와 나눈 이야기가 국화빵보다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올게요. 열심히 하세요, 파이팅!”
인사하는 내게 그가 잠시만 기다리라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잠시 후 그가 내민 한 권의 책.
제목은 ‘산려소요(散慮逍遙)’ 세상 일을 잊어버리고 자연 속에서 한가하게 즐긴다는 뜻이다.
그랬다. 그는 한때 산려소요를 꿈꾸던 사람이었다.
여유를 갖고 세상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자연을 즐기고 싶었던 남자가 국화빵을 굽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지 나는 다 알지 못한다.
한때 그와 한 교실에서 동양철학 강의를 들었던 인연으로 그는 내게 이 책을 선물했을 뿐이다.
산다는 게 산려소요처럼 고상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국화빵처럼 즉물적(卽物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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