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안 11/24)
요즘 매주 만나는 여인이 있다.
가끔 카톡으로 '오늘 수업 맞아요?'하고 물어오는 86세 흰 머리 소녀.
'수업은 내일인데요. 오늘 목요일이잖아요.'
무안하지 않게 스마일 이모티콘을 함께 보내면 다시 회신이 온다.
'내가 가끔 인지 장애가 오나봐. 날짜나 요일을 헷갈려.'
'지극히 정상입니다. 저도 헷갈릴 때가 많은 걸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지만 속으로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니.
처음 기타교실에서 그녀를 보고 기겁하듯이 놀랐다.
구부정한 허리로 지팡이를 짚고 나와 기타를 치는 흰 머리 소녀.
그녀는 작년에 고관절 수술을 받고 이제 막 1년이 지났다고 했다.
집에 누워 지내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 기타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젊은 시절 클래식 기타를 접했다고 한다.
직장 때문에 바빠서 계속하지 못한 기타를 뒤늦게라도 쳐보기로 했다고.
진지하게 악보를 보며 연주하는 그녀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평균연령 50대의 기타교실 회원들 속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기타를 배우는 그녀
나는 나이 때문에 기타교실 나가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는데
그녀는 나이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와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고관절 수술하기 전까지 손수 운전을 하고 다녔던 그녀는 기동성이 제일 아쉬운 부분이란다.
스마트폰에 택시 앱을 깔아놓고 기타교실 오는 날은 그걸 이용한다기에
"가실 땐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저희 집도 같은 방향이거든요."
자연스럽게 그녀와 나는 기타교실 단짝이 되었다.
"오늘 택시비 굳었으니까 언니가 밥 살게."
그러면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한다. 때론 집에 올라가 차를 마시기도 한다.
좀 적적하신가 싶어 기꺼이 따라가는 편이다.
이층 계단이 불편할 텐데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계단을 오른다.
하루에 만 보를 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요즘 칠팔천 보 정도는 걷는다고.
거실 벽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자격증, 표창창, 훈장 등이 그녀의 일생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역 여성계의 리더로 불리며 평생 현역으로 살아온 그녀는
팔십대에 이르러 시 낭송과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모양이다.
시 낭송은 개인지도를 받아 무대에 설 정도가 됐고, 기타는 나처럼 초급을 막 벗어난 실력 같다.
내후년에 미수(米壽) 기념으로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그녀는
얼마전 나에게 그룹사운드 활동을 권하기도 했다.
색소폰, 건반, 드럼까지 갖춘 밴드가 있는데 기타로 합류하자는 제안이었다.
실력도 안 되지만 이 나이에 무슨 밴드? 하고 기겁을 했는데
그녀는 요즘 그 밴드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거였다.
내가 아는 그 밴드는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그룹인데 86살에 그룹사운드라니
용기가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밴드에서는 대우 차원에서 그녀를 받아들였겠지만
남의 시선이나 고정관념 따위 가볍게 물리치고 사는 그녀가 눈부시게 부러웠다.
누군가에겐 극성으로 비치기도 하겠지만 주관이 뚜렷한 삶을 사는 그녀가 얼마나 멋진가.
미국의 조지 도슨이라는 사람은 101세 나이에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책을 출판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자신이 문맹임을 비밀로 하기 위해 한국전쟁 당시 해군으로 복무하면서도
가족들에게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98세 되던 해 성인들을 위한 문자 교육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틀 만에 영어 알파벳을 모두 외어버렸다고 한다.
뒤늦게 글을 배운 도슨은 물 만난 고기처럼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해 마침내 자서전까지 내게 된 것이다.
'당신은 나이만큼 늙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만큼 늙는다.'
조지 도슨이 남긴 이 말은 세계적인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나의 기타 파트너 흰 머리 소녀의 나이는 아마도 20대? 아니면 30대?
하긴 나이가 무슨 소용일까. 달력 나이는 그녀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