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지고 나무꽃 한창이더니 그마저도 비바람에 다 졌다. 이 비가 그치면 맹렬한 더위가 찾아오겠지.

은거를 즐기기엔 애로가 많은 계절이지만 혼자 잘 노는 사람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대로 변방의 사계를 유유자적 살아간다. 때로는 유랑으로 때로는 칩거로.

집 근처에 작은도서관이 생겨서 오다가다 들러 책을 읽는데 특유의 아늑한 정적과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참 좋다.

드나드는 사람이 별로 없어 편한 복장으로 가도 신경 쓰이지 않는 곳, 은둔을 즐기기에 딱 좋은 공간이다.

고를 수 있는 책이 많지 않지만 선택장애를 느끼지 않아서 오히려 마음 가볍다.

 

어제는 비가 와서 작정하고 작은도서관에 들렀다.

낮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공적인 장소로 도서관만한 곳이 또 있을까.

짐짓 즐거워하며 며칠 전에 읽다 온 김호연의 장편소설을 마저 읽을 참이었다.

“책 좋아하시는 모양이죠?”

자원봉사 조끼를 입은 여인이 다가와 살갑게 아는 척을 한다.

매번 다른 사람이 도서관을 지키고 있더니 오늘은 저 분이 관리를 맡은 모양인가?

가볍게 목례하고 다시 책에 눈을 꽂는 순간, 그분의 ‘말씀’이 터져 나왔다.

“제가 권하고 싶은 책이 있어서요. 인생이 바뀌는 책입니다. 아주 유명한 분이에요. 인류의 스승이시죠.”

내미는 책을 보지 않고도 그녀의 말끝에 눈치를 챘다. 오늘 임자 잘못 만났네. 싫은 내색 없이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재빨리 머리를 굴리는 사이 그녀는 간곡한 눈빛으로 내 앞에 와서 앉는다.

무엇엔가 깊이 빠진 사람들 특유의 번득이는 눈빛, 신기(神氣)가 도는 얼굴로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분위기.

“아, 그 책 인터넷에서 봤어요. 안 봐도 돼요.”

그녀는 슬그머니 일어나 책을 다시 서가에 꽂는다. 그 책이 서가에 꽂혀있는 이유가 뭘까? 증정본으로 온 책일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포교활동은 곤란하지. 교묘하고 치밀하게 파고드는 그들이 저의가 불쾌하다.

엉뚱한 신념에 사로잡혀 불특정다수를 포섭하려는 행동이 불편하다.

내 등에 꽂히는 그녀의 시선이 따가워 결국 한 시간 만에 작은도서관을 나오고 말았다.

빗소리 들으며 편안하게 책 읽을 공간을 갑자기 도둑맞은 느낌이다.

믿는 사람들아. 제발 안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지 말아다오.

너는 믿어서 행복하겠지만 나는 안 믿어서 자유롭다. 독실한 ‘非신앙인’이란 말이다.

 

언젠가부터 잠이 줄어들어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시간이 많아졌다.

잠을 청하는 게 힘들어 유튜브로 음악을 듣거나 오디오북을 들으며 잠들곤 한다.

눈으로 읽는 책보다 귀로 듣는 책이 수면유도에 더 효과적이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문학 작품이나 음악을 만나기도 해서 좋다.

며칠 전엔 대금으로 연주하는 ‘야상곡’에 심취해 세 번을 반복해서 들었는데

원곡(김윤아)보다 분위기가 더 그윽하고 아름다워 흠뻑 빠졌다.

대금으로는 처음 듣는 곡이라 상세 소개를 읽으려고 화면을 터치했더니 댓글이 자그마치 987개.

아니, 대금 마니아들이 이렇게나 많았던 거야?

호기심에 댓글을 터치해봤더니 한 사람의 구독자가 쓴 댓글에 수백명의 답글이 달려있었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은 어느 50대 가장이 쓴 댓글은

‘애절한 대금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쏟아진다. 시간을 1년만 더 과거로 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 외롭고 힘들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댓글 아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구마구 응원의 답글을 달고 있었던 것이다.

‘용기를 내세요. 꼭 나을 겁니다. 저도 항암중인 환자입니다.’ 등등

격려와 위로의 댓글을 읽고 나도 몰래 울컥 감동을 받았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타인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그 마음이 인간 본성의 아름다운 일면인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면서.

그런데 하나하나 댓글을 읽어 내려가던 내 눈에 이상한 문장이 나타났다.

‘아침 저녁 허경영 이름을 백번씩 부르세요. 반드시 낫습니다.’

예수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허경영을 부르면 불치병도 낫고 만사형통이란다.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형태의 광신도가 나타나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이런 상황에서 허경영이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릇된 확신에 사로잡혀 남의 이목은 상관없이 엉뚱한 댓글을 싸지르고 다니는 그 인간이 불쌍한 생각마저 든다.

음악을 통해 공감하며 고통을 나누고 위로하는 공간에서 자신의 믿음을 전파하는 인간이라니.

인터넷 인연이 뿌리 없는 관계긴 하지만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예의는 있는 법인데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유사종교를 강권하는 건 불쾌하기 짝이 없다.

믿는 사람들아, 제발 안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지 말아다오, 제발!

 

https://youtu.be/2w1H7TGdB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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