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식으로 인해 또 하나의 가족관계를 맺는다. 엄밀한 의미로는 가족이 아니지만 반려견도 가족으로 여기는 시대에 사돈도 가족이 될 수 있지 않는가. 물론 관계가 돈독하고 화기애애한 집안에만 해당되겠지만.

사돈(査頓)은 한자어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선 사용하지 않는 말로 '사(査)는 조사하다', '돈(頓)은 조아리다'라는 뜻이다. 원래 사돈이라는 말은 만주어의 '사둔'이나 몽골어의 '사든'에서 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는 사돈을 사둔이라고 부른다. 만주나 몽골에서 들어온 말을 사대부들이 한자를 붙인 것으로 짐작되니 고구려 때나 고려시대부터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돈(査頓)은 우리가 아는 사돈의 뜻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 무근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혼인으로 맺어진 두 집안이 상대방 가문을 암암리에 조사(査)하기도 하고 서로 어려운 관계라 머리를 조아리는(頓) 심정이 되기도 하니까.

자식을 나누어 가지면서도 가깝게 지내기 어려운 관계라 그런지 사돈을 두고 내려오는 속담도 많다. ‘사돈 남 말 한다’ ‘사돈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를 비롯해 ‘딸네 사돈은 꽃방석에 앉히고 며느리네 사돈은 가시방석에 앉힌다’는 말도 있다. 사돈이 얼마나 어렵고 조심스러운 관계인지 때로는 남보다 못한 관계인지 언중유골로 전해주는 속담이다.

“우리는 사돈이 없어.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도.”

하고 탄식하는 지인이 있다. 1남1녀 잘 키워 시집 장가 보냈는데 사돈이 없다니? 동그랗게 뜬 내 눈을 보며 그녀가 나직이 들려준 얘기는 세태의 단면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집 아들이 오랫동안 사귄 여자가 있다며 결혼하고 싶다기에 상견례 날을 잡았다고 한다. 오래 두고 사귄 상대니 믿을만하겠거니 생각했단다. 고급 한정식집에서 두 내외와 아들 딸이 자리를 잡았는데 이상하게 예비 사돈 둘이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더라는 거다. 나란히 앉았지만 마지못해 나온 자리처럼 어색하고 특히 안사돈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라나. 예비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했더니 그녀는 식사 자리가 끝나자마자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오래 전에 이혼했다고, 헤어진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이라고. 딸이 애원을 해서 어쩔 수없이 상견례 자리에 잠시 나온 거라고.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는 엄마에게 그집 아들이 하는 말

“부모 이혼한 게 자식 죄는 아니잖아요. 우리만 잘 살면 되잖아요.”

다행히 그집 아들은 결혼한 지 십년이 넘도록 잘 살고 있다. 친모 대신 시모를 어머니처럼 의지하는 며느리와 각별한 정을 나누며 지내는 지인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손가정에서 자란 며느리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흠을 들추지 않는 시어머니,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

아들이 장가든 지 삼년 뒤 이번엔 딸이 사윗감을 데려왔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듬직한 직장에 근무하는 총각이라 내심 흡족하게 여겼다. 서둘러 상견례 날을 잡아 혼인 절차를 밟게 되었다.

그런데 상견례 당일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안사돈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예비사위가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하는 말이 ‘어머니가 급한 일로 못 오시겠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알고보니 두 부부는 존혼했더라나.

아들 사돈은 이혼, 딸 사돈은 졸혼. 그래서 사돈이 없다고 한숨짓는 지인은 사돈끼리 돈독하게 지내는 집이 참 부럽다고 한다. 자식을 나누어 가진 사이로 친밀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은 것같다. 시대가 변해도 사돈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껄끄러운 관계일 뿐일까.

얼마전 뉴스에 서울의 한 예식장에서 벌어진 사건이 보도되었는데 웨딩홀 식당에서 신랑 신부 가족이 의견 충돌이 일어나 식탁을 뒤집어엎는 사태가 발생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치고받는 액션이 벌어진 후 사위가 장인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니 깜짝 놀랄 일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객들도 있는데 그 앞에서 치고받고 싸우다니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상식의 범주를 넘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지만 이쯤 되면 말세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만하다.

부모 노릇 자식 노릇 제대로 하고만 살아도 인생 성공하는 건데, 나아가 세상이 화평해질 텐데. 각기 맡은 최소한의 소임을 다하기도 쉽지 않은가 보다. 사회의 최소 단위가 가정이라는 말도 있지만 요즘 사람들은 가정이라는 공동체보다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가 보다. 나 또한 예외일 수는 없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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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혼수상태에 빠진 지 석 달째.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뒤 콧줄로 연명하다가 그조차 힘들어지자 산소호흡기 신세를 지게된 것이다.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도 동생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60년밖에 못 살고 이승을 떠난다는 게 못내 억울했던 것일까.

“올케, 힘들지? 니가 잘못했다고 빌어봐. 잘못은 내 동생이 많이 했겠지만 니가 용서해달라고 빌어.

자식들 걱정하지 말고 어서 떠나라고 부탁해.”

2년 동안 병마와 싸우다 죽음의 강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동생이 너무 안타깝고 기가 막혀

올케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의식이 없어도 귀는 열려있을 거라고, 다 용서하고 떠나라고 말해보라 일렀다.

누워있는 사람보다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더 걱정스러웠다.

올케는 50대 중반, 슬하에 1남1녀가 있고 아직 숙제가 많이 남았다.

 

병원에 있을 때 연명치료거부 서약을 해두라고 내가 그만큼 일렀건만,

동생도 가족들도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가망 없는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다는 건 고문일텐데.

무의식 상태로 오래 누워있는 것만큼 가혹한 일이 또 있을까?

2년전 비강암 진단을 받은 동생은 독성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았지만

소용이 없어 마지막 수단으로 수술을 결심했다.

두개골을 열고 오른쪽 안구 적출, 코뼈와 잇몸까지 도려내는 18시간의 수술을 이겨내고 살아났지만

끈질긴 암세포는 침샘으로 전이되고 얼굴 전체로 점점 세력을 넓혀갔다.

동생이 정확한 진단명을 받기 전까지 주위 어느 누구도 비강암이란 암이 있는 줄도 몰랐다.

콧속에도 암이 생긴다니 금시초문이었다.

 

독성항암제 - 방사선치료 - 수술 - 표적항암제 - 면역항암제 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했지만

동생의 얼굴은 괴사가 진행되었다.

미간에 생긴 혹이 빨갛게 부풀어 진물이 흐르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동생은 방사선치료 과정에서 엄청난 부작용이 일어나 치료를 중단했는데

뒤에 알고 보니 방사선을 거부하는 암은 독종 중에 독종이라 수술해도 소용없다고 한다.

과잉진료였는지 실험 대상이었는지 덕분에 동생은 1년 이상 명을 이어갔지만

끝내 백약이 무효인 상태로 지금 코마(coma)에 빠져있다.

그 험한 고생을 하고도 회복할 수 없다니 도저히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는 것일까.

 

엄마가 딸 셋 끝에 낳은 2대독자 동생은 집안의 온갖 혜택을 다 받고 자랐다.

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다. 최고학부를 나왔고 만능 스포츠맨에다 낚시, 골프, 등등 놀기도 실컷 놀았다.

부모 기대를 가장 많이 받은 외아들이 부모 속을 가장 많이 썩혔고 끝내 남은 누이들을 걱정시키고 있다.

그는 이제 쇠망(衰亡)의 기운에 들어선 것일까. 문득 복진타락이란 말이 떠오른다.

복진타락(福盡墮落이란 지은 복(福)만큼 받아 써 다하면(盡)

다시 또 업에 따라서 떨어지게 된다(墮落)는 뜻이다.

모든 중생은 업(業)에 따라서 천상에 가서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하는데,

설사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는다고 해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 버리면

다시 또 업에 따라서 떨어지게 된다.

인간의 수명이나 부귀영화도 쇠망(衰亡)의 운에 들어서면 재운도 수명도 끝나는데

불가에서는 그것을 두고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 하는 것이다.

복이 다하면 고통속에 타락하니 자신이 지은 복이 끝나기 전에 새로운 복을 지으라는 뜻이다.

 

어릴 때부터 복덩이로 불리던 동생은 마침내 자신의 몫을 다 받아 써버린 걸까.

바닥이 드러난 줄도 모르고 마음껏 복을 누리다가 한방 크게 얻어맞고 누워버린 것일까.

새로운 복을 지을 시간도 없이.

2년동안 투병하면서 동생은 어릴 때 받았던 관심의 몇 배를 더 받았다.

친인척, 직장 동료, 주변 지인들.... 그 많은 우려와 근심을 뒤로 한 채 마침내 의식불명에 빠져버렸다.

미이라 같은 모습으로 중태에 빠진 동생을 고통없는 세상으로 보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요양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뗄 수 없다는 거다.

뇌사 판정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산소호흡기를 떼는 건 살인행위라고.

코마(의식불명)는 뇌는 살아있으나 의식이 깨어나지 않는 상태이고,

뇌사는 뇌는 죽고 심장만 뛰고 있는 상태로서 인공호흡기로도 보통 1달을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뇌사 판정이 곧 사망인 셈이다.

동생에겐 2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죽음에 대한 대비가 없었는지.  너무 안타깝고 속상하다.

무슨 미련이 남아 저렇게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무슨 억하심정이 그의 의식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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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다니길 좋아한다. 혼자 여행하고 혼자 사진 찍고 혼자 걷길 좋아한다.

운동도 혼자 할 수 있는 수영과 요가를 즐긴다. 파트너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운동이 더 익숙하고 편하다.

무리지어 다니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번거로운 것보다 좀 외로운 게 낫다 싶어서 혼자를 즐기는 편이다.

아들 어릴 때는 혼자 크는 녀석이 안쓰러워 온 동네 애들 다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가족여행도 많이 다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깨달았다. 남편도 아들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동안 나에게 억지로 끌려다녔다는 것을.

운전대만 잡으면 졸고 멀미가 심해서 배도 못 타는 남편과 호캉스 체질인 아들에 비해

나는 호기심천국이라  여기 저기 헤매고 다닌다.

내 딴엔 그게 세상공부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두 남자에겐 억지춘향이었던 거다.

 

이순에 접어들며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은 ‘한 달에 한 번 이상 장거리여행’이었다.

당일치기는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1박 이상은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식구에게 동의를 구한다 ‘나, 이번엔 어디어디 가고 싶어. 같이 갈래요?’하면

백발백중 ‘혼자 갔다와.’ 대답이 돌아온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건 내 나름의 예의다.

봄 가을에 나는 섬 여행을 주로 다니는 편인데 올해는 서쪽 바다 백령도, 대청도, 어청도까지 갔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1회성이지만 때로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 불문, 남녀 불문 대화가 통하고 정서적인 공감대가 있는 사람.

말 몇 마디 나눠보면 생각과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사람. 어청도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물 맑기가 거울같아서 붙은 이름 어청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대도 있다.

제3공화국의 2인자 김종필이 1963년 전북 금산군을 충남에 주고, 어청도는 전라도에 주는

물물교환(?)을 밀어붙여 가까운 대천항 놔두고 군산항에서 배를 타야 하는 섬.

하지만 그 배편도 군산에서 하루에 딱 한번이고 출항시간도 들쭉 날쭉이라 마음 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이 더 들면 영원히 못 가볼지도 몰라서 억지를 부려본 게 올해다. 

 

군산항에서 뱃길로 2시간, 어청도등대는 과연 훤칠하고 눈부셨다.

마을 안쪽에서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30분쯤 오르니 헌헌장부 같은 그 등대가 나타났다.

들머리의 돌담을 따라 입구에서 안쪽으로 조금씩 좁아지다가 마침내 느낌표처럼 우뚝 서 있던 돌올한 모습.

하얀 옷에 빨간 모자를 쓰고 특이하게도 등탑 윗부분은 한옥의 서까래처럼 꾸며졌다.

일제강점기(1912년)에 대륙진출의 야망을 가진 일본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어청도등대는 백 년이 넘은 역사와 함께 기암절벽 위에 앉은 모습이며 주변 풍광이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서해안 남북항로를 이용하는 선박들의 길잡이로 우뚝 서있는 등대에 홀딱 반했다.

보고 또 보고 찍고 또 찍고 등대에 심취해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혼자 오셨어요?’

나이는 50대 중후반? 활달하고 명랑해보이는 여인, 그리고 그녀에겐 짝이 있었다.

매달 한 번씩 섬 여행을 함께 하는 파트너라고 했다. 지난달엔 외연도를, 다음 달엔  연평도를 갈 예정이란다.

그녀는 조류에 관심이 많아 숲에서 울고 있는 새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었고

파트너는 식생(植生)에 조애가 깊어서 서로 이야기가 통했다.

어청도는 새들이 쉬어가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올해는 기류 변화로 새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여행의 묘미는 풍경과 함께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어청도 여행이 딱 그랬다.

등대에서 헤어진 우리는 각자 방식대로 섬 투어를 끝내고 저물녘 부두에서 만났다.

나는 섬 능선을 타고 동쪽 해안으로 트레킹을, 그들은 서쪽 해안을 돌아 마을길로 접어드는 코스를.

함께 가자는 말도, 따로 가자는 말도 필요 없었다.

권유도 강요도 필요없는 자유로운 영혼은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자 덕목이기도 하다.

저물녘 부둣가에 앉아 우럭 회를 안주로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여행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보니 끊임없이 소재가 흘러나왔다.

각자 좋았던 여행지를 추천하기도 하고 언젠가 먼 섬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숲 근처에선 휘파람새가 울어대고 우리는 술이 모자란다고 울어대고.... 그렇게 그 밤이 지나갔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자리를 함께한 시간들이 무척 즐거웠다. 다시 만날 수 없다 해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은 복된 인연이랄까.

며칠 후 카톡으로 그녀가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등대를 향해 걸어가는 내 뒷모습.

나는 카톡 프사를 그 사진으로 바꾸고 말았다. 한동안 그 사진을 다시 바꾸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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