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 여왕이 사라졌다. 하룻밤 사이에 어떤 낌새도 없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던가. 평생 고향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며 동네 인심을 잃지 않았던 부식가게 아줌마,

아무리 힘들거나 어려워도 내색하지 않고 괜찮아’ ‘잘 될거야를 연발하던 긍정의 아이콘. 오죽하면 지인들이 그녀의 별명을 긍정 여왕으로 불렀을까.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녀는 중학교 진학도 못 하고 열세 살에 학교 급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관공서나 회사 등에는 잔심부름 해주는 급사(給仕)를 두었는데

그녀는 어린 나이에 아침 일찍 출근해 교무실 청소를 하거나 교사들의 잔시중을 들으며 돈을 벌었다.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책상 정리를 도우면서 그녀는 타이핑을 배웠고 몇 년 후엔 서무실로 진출하게 된다.

그녀의 성실함과 착한 성품을 좋게 본 학교에서 그녀를 급사에서 서무로 진급시킨 것이다.


무능한 부모와 연년생으로 줄줄이 자라는 동생들을 위해 그녀는 꽃다운 시절을 반납하고 서무실에서 일에 치여 살았다.

공납금을 현금으로 받던 시절, 하루 종일 돈 세느라 머리가 아팠던 그녀는 근면 성실로 재단의 신임을 얻어

당시 학교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던 횡령이나 배임으로부터 안전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가정환경 때문에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혼자 벌어서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툴툴대거나 신세 한탄을 하지 않았다.

빠듯한 월급으로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며 늘 마이너스 인생을 살았지만 한 번도 못 살겠다거나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급급했던 그녀에게 비관이나 절망은 사치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수렁 같은 삶을 초원으로 여기며 살아온 그녀는 삼십대 후반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다.

동생들 공부시켜 시집 장가보내고 마지막으로 테이프를 끊은 그녀에게 어머니가 했던 말은, 

시집 안 가면 안 되겠니? 이제 와서 남의 집 종살이는 왜 하려고?’

무한긍정의 딸을 둔 그 어머니는 놀랍게도 비관적인 허무주의자였던 것이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몫이 있고 운명에는 질량불변의 법칙이 작용한다고들 한다.

어릴 때 많은 복을 누린 사람들은 늙어서 초라해지기 쉽고, 청춘을 맘껏 구가한 사람은 나중에 초라해지기 쉬우니

겸손하게 자신의 복을 지키라는 뜻으로 들었다.

나는 열세 살에 사회로 나와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온 그녀가 늦복을 누릴 거라고 믿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흔한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언제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무한 긍정으로 살아온 그녀였기에

뒤늦은 복이라도 실컷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던 건지도 모른다.


평생 일하라는 팔자를 타고 났는지 결혼해서도 가게를 운영하던 그녀는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살았다.

늦은 나이에 시집 온 며느리를 나이 많다고 삐쭉거리며 냉대를 일삼던 시어머니는 반신불수의 몸을 끌고도 경로당에 다니며 며느리 흉보기에 바빴다.

오죽하면 경로당 노인들이 입을 모아 말했을까. ‘저 노친네가 굴러온 복을 발로 차네. 쯔쯧~’

출가 전에는 친정 식구들 건사하다가 결혼해서는 시집까지 짊어져야했던 여인,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그녀를 천사와 동급으로 생각했다.

날개만 없을 뿐 그녀는 분명 천사였고 고달픈 자신의 삶을 무한긍정으로 받아들였던 효녀 심청이었다.


긍정 여왕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가게로 모여들었다.

굳게 닫힌 그녀의 가게 문에 상가 임대종이만 초라하게 붙어있었다. 부동산 말에 따르면

진작부터 가게 현상유지가 어려웠는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더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얼마 전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단다. 가게에 매여 제 시간에 밥도 못 먹었을 그녀가, 고생 끝에 낙 대신 암이라니.

나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분노가 치밀었다.

매사 긍정적으로 살아야 성공한다고, 부정적인 사람은 멀리하고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그런데, 긍정의 아이콘이었던 그녀가 이런 푸대접을 받아도 되는 걸까? 이거야 말로 긍정의 배신 아닌가?

나는 그동안 긍정성에 대해 지나친 신뢰를 가졌던 게 아닐까.


론다 번의 시크릿이나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처럼 세상에는 긍정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책들이 많다.

유명 강사들은 객관적인 실험과 통계를 제시하며 긍정이야 말로 성공의 열쇠이며 삶을 바꿀 수 있는 키워드라고 강조한다.

자기계발서와 코칭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긍정 마인드는 미국이 원조로 알려져 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인의 행복지수는 세계 23, 세계 우울증 치료제의 3분의2가 미국에서 소비되고 있다고 한다.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으며 자국민의 긍정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라가 내면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긍정 마인드가 반드시 성공과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건 사실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한지는 의문이다.

천사처럼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거절도 못하고 남의 비위를 맞춰주며 사는 천사병 환자는 얼마나 불행한가.


무한긍정의 함정에 빠져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던 그녀가 안쓰럽다.

세상 어던가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고 믿었던 그녀가 말기암을 선고받다니. 그녀의 무한 긍정이 시한부로 끝난 느낌이다.

의심하고 부정하며 조금씩 미워하며 살 일이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긍정보다 부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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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울릉거리는 울릉도. 십 수 년 전의 추억을 찾아 나선 길은 내게 씁쓸한 후유증을 남겼다.

옛사랑과 추억의 장소는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패키지 여행으로 선택하는 울룽도를 머리 속 지도 한 장으로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한 바퀴 돌았고,

일 년에 50일 정도만 가볼 수 있다는 독도를  밟고 왔는데도 왜 이렇게 허망하고 미진한 기분이 들까?

그 유명한 따개비칼국수에 따개비가 열 마리도 안 들어있어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육지의 두 배라서일까,

배멀미에 시달리며 독도까지 갔는데 지척에 보이는 등대까지도 올라가지 못하게 하던 출입금지 팬스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래 전 내 기억 속의 울릉도는 열길 물 속이 환히 보이던 신비의 섬이었다.

도동항 주변으로 올망졸망 모여있던 배들, 손님을 부르던 여관 주인들, 육지의 식생과는 너무도 달랐던 성인봉 가는 길의 식물들,

낚싯줄을 던지자마자 미끼를 물고 올라오던 순진한 고기들, 모든 것이 참으로 맑고 순수해 보였는데.

인구 만 명이 사는 울릉도에 차가 5천대라니 그야말로 섬이 가라앉을 지경 아닌가. 섬 전체가 경사도 높은 산지라 사륜구동 택시만 다니던 때가 언제였던지.

올해 일주도로가 완전 개통되었다는 소식에 환호하며 울릉도를 찾았지만 도로는 편도 소통으로, 한 차선이 가면 한 차선은 기다려야 하는 구간이 많았다.

그 불편한 도로를 달리면서도 관광버스 기사님은 독도를 지켜주는 것이 울릉도 사람들이니 울릉도에 와서 돈 많이 쓰고 가시라.”고 연신 강조했다.

머지않아 사동항에 비행장이 생기고 중국 관광객들이 몰려올 거라는데, 그런 마인드로 관광객을 맞이해도 되는 걸까 

나의 기우와는 달리 울릉도는 한 겨울을 제외하곤 관광객으로 넘치는 모양으로

대다수의 주민들이 그닥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무뚝뚝하게 손님을 맞았다. 살갑게 대하지 않아도 관광객이 많이 몰려오니까 그렇겠지만.


섬 한 바퀴를 도는 관광버스에 줄줄이 오르던 사람들, 삼선암, 거북바위, 촛대바위 등등 해안마다 인증샷을 찍던 사람들,

특히 독도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단체사진을 찍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애국자로 보일만큼 독도를 칭송하고 있었다.

독도에 발 딛는 순간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난다고도 했다. 그 눈물나는 독도에 서 있을 시간은 단 30.

그것도 계류장에만 머물러야지 섬 위로 올라 등대까지 가보지도 못한다니..... 이유는 쓰레기 무단 방치라는 거였다.

일부 몰지각한 관광객이 쓰레기를 마구 버렸기로서니, 미리 안내하고 계도하면 된 것을 출입금지로 막아버리다니,

군사정권 시대의 사고방식이 아직 남아있는 건 아닌가 싶어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울릉도 자유여행을 통해 그나마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은 활기 넘치는 저동항 풍경이었다.

전날 잤던 D리조트의 럭셔리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저동항 허름한 모텔에 든 것은 이른 새벽의 항구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화려한 일출은 없었지만 바다에서 돌아온 배와, 그 배에서 쏟아지던 생선들,

오징이를 받아 그 자리에서 내장을 꺼내 대꼬챙이에 꿰는 여인들로 어판장은 아연 활기가 넘쳤다.

요즘 오징어가 제철은 아니지만 관광객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일정량만 잡는 거란다.

그 흔한 오징어가 언젠가부터 어획량이 줄어들어 값이 여간 비싼 게 아니었다.

하긴, 울릉도 호박엿이 유명하다는데 여행 중에 호박 모종 한번 보지 못했다.

그 옛날 섬 사람들이 먹고 명을 이었다는 명이나물과 부지깽이나물이 지천이었고, 어딜 가나 섬바디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동행했던 친구는 성인봉을 향해 떠나고 혼자 남아 발길 닿는대로 걸었던 하루는 참 여류롭고 편안했다.

조망이 트이는 곳마다 그녀는 사진을 찍어 전송해왔고, 나는 해안 경치를 회신했다.

그녀는 산에서 나는 바다에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던 시간들이 행복으로 남았다.

오래전 내가 다녀오면서 놓친 곳이 몇 군데 있어 혼자 휘적휘적 찾아가보았지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였다. 사람도 자연도 한결같기는 어려운 모양인가.

그러나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내 나이쯤 되면 무엇에든 격렬하게 공감하거나 낙망하지 않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울릉도 최고의 조망은 우리나라 10대 절경에 든다는 태하향목전망대였다. '태하'는 옛 우산국의 도읍지이자 울릉도 개척민이 첫 발을 내디뎠던 곳이다.

태하마을에서 버스를 내려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 아름드리 후박나무가 반기는 숲길을 걸어가니 한 순간 눈 앞이 탁 트이며 전개되던 풍경!

울릉도 북면을 향해 이어지는 기암절벽과 해안선이 시선을 압도해 감탄사마저 잊었다.

그 해안의 물빛이 너무도 투명하여 천길 낭떠러지인데도 투신의 유혹을 느낄 정도였다. 저런 물빛의 바다에 빠진다면 영혼조차 에메랄드 빛이 되지 않을까.

전망대 근처 단독가구에 사는 노인은 줄장미를 심어 가꾸면서 내게 말했다.

누군가 찾아오면 보여줄 게 없어서, 꽃이라도 보라고..... 이제 내 평생 남은 일은 이것 뿐이라우.”

생애 말년을 누군가를 위해 살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 한 마디, 꽃 한 송이, 누군가를 위해 줄수 있는 그 마음이 천국 아닌가.


사흘동안 내가 걸었던 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그 옛날 섬사람들이 넘어 다녔다는 행남옛길이다.

털머위, 섬기린초, 후박나무 등이 자생하는 고갯마루는 짙푸른 상록수림으로 우거져 원시림을 방불케 하더니

항아리같은 도동항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깎아지른 V자 협곡 사이로 코발트색 바다와 하얀 등대가 나타났다.

조릿대 터널과 곰솔 군락을 지나 약초냄새 그윽한 행남마을 흔적과 그 길 따라 오솔길 걸어 수직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

그리고 울릉도의 어업전진기지 저동항을 만났다.

방파제와 한몸이 된 촛대바위는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 때문인지 더욱 애잔해 보였다.


육지에서 울릉도로 가는 가장 짧은 뱃길이 후포항이라 차를 후포에 두고 갔더니 돌아오는 길이 만만찮았다.

낯선 지리에다 한밤중 비는 퍼부어 내리고..... 배멀미 후유증에 심신이 지쳤지만 이를 악물고 악셀레이터를 밟을 수 밖에.

추억 속의 울릉도를 아름답게 누비고 싶었는데 고생 바가지로 끝났다. 이래 저래 울릉도는 이번 생에 다시 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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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집을 나서며 일말의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다. 행여 기다리다 지쳐 가버리진 않았을까.

얼마 전 그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같은데, 그게 언제였는지 아리송하다.

멀리서 그의 기척만 느끼고도 한 달음에 달려가던 때가 있었는데 그의 소식을 귀 밖으로 흘려듣다니, 사랑이 식은 게 틀림없다.

오지도 않은 그를 기다리며 바람 찬 계곡을 서성이던 날들의 열정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문득 보고 싶다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그리워 어젯밤은 잠을 설치기도 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만나지 못했으니 3년만인가.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겠지. 늘 허둥대며 찾아오던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자동차 가속페달에 나도 몰래 힘이 들어간다.

거리는 벚나무들이 온 몸으로 피워 올리는 연분홍 꽃불로 눈앞이 아찔하다.

일 년에 단 며칠 황홀하게 타오르기 위해 살아왔을지도 모르는 벚나무. 꽃이 피기 전에는 아무도 그 존재를 눈부시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습자지처럼 얇은 꽃잎들이 일시에 내지르는 비명에 놀라 밖으로 뛰처나온 사람들은 마구 호들갑을 떨어댄다.

여기저기 축제를 열고 놀이를 즐기며 꽃불이 번져가는 걸 중계방송하고 있다.


꽃구름 아래를 달려 그가 머물고 있을 계곡 근처에 차를 세웠다. 가슴이 두근대며 마음이 바빠졌다.

생각해보니 해마다 그는 벚꽃이 피기 전에 다녀가곤 했던 것 같다. 올해는 벚꽃이  빨리 피었으니 어쩌면 아직 그가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희망고문이 될지라도 그를 보기도 전에 포기할 수는 없다.

가뭄에 드러난 암반과 굵은 자갈길을 건너뛰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를 처움 만났던 날의 설렘과 떨림을 생각하면서.


첫눈에 보기에도 그는 반골기질이 뚜렷하며 날렵한 이미지를 풍겼다.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는 눈빛에 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을 만큼.

그 눈빛에 반해 털썩 주저앉아 마냥 바라보기만 했던 달뜬 가슴. 첫눈에 반해 스토커가 된 나는 그가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곤 했다.

유명 연예인을 따르는 소녀 팬처럼.

햇봄에 처음 만난 그는 초여름 지리산 주능선까지 나를 불러냈다.

아랫도리는 얼룩덜룩한 옷이었지만 형형한 그 얼굴은 산 아래 계곡에서 볼 때보다 더 기품 있고 아름다웠다.

산행을 멈추고 당장 그와 함께 산을 내려가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바람둥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걸출한 외모로 뭇 사람들 시선을 모으며 인기몰이를 하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존재.

누구에게나 신비로운 눈웃음을 보내다 어느날 문득 차갑게 식어 돌아서는 인물.

하지만 나는 일 년에 단 며칠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축복 같았다. 설령 나 말고 다른 사람들 가슴을 뛰놀게 한다 해도 질투나지 않았다.

그는 사유재(私有財)라기보다 일종의 공공재(公共財)였다고나 할까. 유명인들이 한 사람 소유가 되기 어려운 것처럼

그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며 아끼고 사랑할만한 대상이었다. 기꺼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 그렇게도 반색하며 기뻐하고 기다리던 그를 나는 왜 한동안 잊고 있었단 말인가. 지난 몇 년이 내겐 상실의 시기였던가?

권태와 무기력의 시기였던가? 그를 보며 심기일전 살맛이 나던 때도 분명 있었는데.

가뭄으로 수량이 줄어든 계곡에 진달래꽃이 지고 있다. 암벽에 피를 묻히며 추락한 꽃들은 이내 계곡 물을 진분홍으로 물들인다.

처연한 낙화. 눈길을 피하고 싶다. 못 본 척 해주고 싶다.


계곡을 가로질러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이제부터 그를 만날 수 있는 구간이다.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시간이니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을 볼 수도 있겠다

한 발짝 한 발짝 레이저 같은 눈빛으로 길섶을 뒤지며 걸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그의 누추한 옷들이 널려있었지만 어디에도 그의 빛나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한 발 늦었다, 그는 떠나버린 것이다.

나를 기다려주지도 않고, 입었던 옷마저 챙겨가려다 차마 그건 못하였는지 초라한 넝마처럼 두고 갔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그가 남긴 옷에서 떠나버린 날을 되짚어본다. 일주일만 빨리 왔어도 그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산비탈 반그늘에서 시크하게 웃어주던 그와 재회할 수 있었을 텐데. 시절인연이 맞지 않아 안타깝다.

엇갈리는 인연, 올해도 이렇게 또 그를 보내고 마는구나.

얼레지, 그 고상하고 오만한 꽃.

그를 다시 만나려면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한다. 내년에는 그를 볼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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