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역 앞 그 여관에 들었던 이유는 순전히 눈 때문이었다.

오후 들어 몰려온 짙은 눈구름이 다섯 시도 되기 전에 어둑살을 펼치며 시야를 가로막았다.

원도심에서 눈구경을 하다 시간이 늦어 숙소를 찾다보니 가까운 A역으로 가게되었는데,

역 근처 숙소들이 모두 간판에 불을 끈 상태였다. 코로나19 창궐에 여행객이 없다 보니 영업을 접은 것이다.

눈은 퍼부어 앞은 안 보이고 길마저 미끄러웠다.

지나가던 이에게 잘 곳을 물었더니 길 건너 한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 보란다.

 

“..... 계세요?”

족히 30년은 넘어보이는 허름한 건물에 반투명 유리가 끼워진 조잡한 문.

왠지 께름칙한 기분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서 손바닥만한 문이 열리더니 쭈그렁 노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오늘도 공치나 했더니 웬 손님? 그런 눈빛으로 반갑게 일별하더니 내 이마에 체온계를 들이대고 방명록을 적으란다.

명색이 장급 여관이라는데 80년대 여인숙 분위기다.

“눈이 많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가려구요.”

나는 눈에 갇혀 어쩔 수없이 찾아들었다는 듯 생색 아닌 생색을 내며 열쇠를 받았다.

카드 키도 아니고 비밀번호 키도 아닌 아날로그 열쇠.

복도 양쪽으로 8개의 방이 있는 여관은 나 외에 손님이라곤 없어 보였다.

 

여고시절 수학여행 가서 처음 자본 종로의 어느 여관 같다.

이방연속무늬의 벽지와 촉수 낮은 형광등, 노름꾼들이 죽치던 곳인지 담배냄새가 방안에 쩔었다.

욕실이 딸려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손님이 들 거라는 예상을 못해서인지 방바닥은 냉골, 그나마 침상엔 전기장판이 깔려있다.

하얀 침대 시트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벽지의 무늬만큼이나 조악한 이불이 깔려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갈등했다.

이 거리에 잘 곳이라곤 딱 두 군데 뿐이었는데 다른 한 군데는 외관부터 야릇한 러브호텔이었다.

다급한 김에 거기라도 들어갈까 했더니 카운터에서 거절당하고 말았다.

지금은 대실만 받고, 11시 넘어야 숙박 손님을 받는다나. 돈을 더 주고라도 거기서 잘걸 그랬나?

 

“한 육십은 넘었겄소 이?”

노파가 베개를 갖다준다는 핑계로 방에 들어오며 내 얼굴을 살폈다.

험난한 세상 기이한 일도 많으니 신원조회 대신 말을 붙여보는 것이다.

이 여자가 혹시 가정을 뛰쳐나온 건 아닌지, 빚쟁이한테 쫒기는 몸은 아닌지, 밤새 자살 시도라도 하지 않을지,

세상 풍파 다 겪어본 노파는 한 눈에도 알 수 있으렷다.

“내 나이가 올해 팔십이우. 우리 영감은 팔십다섯.”

계단 아래 내실에서 잠시 스쳐간 얼굴이 영감님었구나 싶었다. 팔십대까지 현역이라니, 대단한 분들이다.

심신이 건강해 늙도록 일할 수 있으니 부러운 일, 두 분이 백년해로하시겠다고 덕담을 해주었더니

노파는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남자가 너무 오래 살면 못쓴당게. 온갖 주접은 다 떨고 잔소리에 치매까지, 오매오매 미쳐부러!

나가 너무 힘들어 작년에 이혼을 한번 했는디 자슥들이 날마다 찾아와 비는 사람에 도로 합쳤당게.

노망난 영감을 자슥들인들 얼마나 반가워하겄소? 긍께, 남자는 그저 돈만 벌어다주고 칠십 전에 가부러야혀.”

하소연하듯 쏟아놓고 노파는 방을 나갔다. 아직 허리도 많이 굽지 않았고 계단을 오르내릴 정도로 무릎도 짱짱해 보인다.

낡은 여관을 지키며 오가는 손님들과 사람 냄새도 나누며 살면 참 좋을텐데 노파는 아무래도 영감이 귀찮은가 보다.

 

빈 방에 누워 망연히 천장을 바라본다. 눈 내리는 밤, 혼자 낯선 곳에 툭 떨어진 기분은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밤새 눈이 내리면 내일 아침 설경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 기대가 더 컸다.

티브이를 켜니 서해안에 폭설주의보가 내렸다. 눈은 모레까지 계속될 거라고 한다.

갑자기 허파가 커지는 느낌이 들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드디어 눈 속에 고립될 기회가 온 건가.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처럼 눈부신 고립을 체험할 수 있겠다. 그 체험에 꼭 일행이 있을 필요는 없고.

 

불면에 익숙한 탓에 밤늦도록 영화를 보다 음악을 듣다 설핏 잠이 드나 했는데

밖에서 와장창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악다구니 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오늘은 손님이 있어 안 싸울라고 했는디 참말로!”

일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빈 공간을 타고 내 방문을 통과해 귀에 닿았다. 건물에 방음이 안 되는 건 확실하군.

눈 오는 밤의 낭만을 오롯이 즐기며 앉은 채 잠이 들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계는 자정을 넘고 있었다.

 

배낭을 챙겨들고 살며시 방을 빠져나왔다. 발소리를 죽일 필요도 없었다,

팔순의 노부부는 저들끼리의 대화(?)에 빠져 사람이 드는지 나는지 관심도 없었다.

아무리 다급하기로서니 모처럼 눈 내리는 이 거룩한 밤을 싸움소리와 함께 지샐 수는 없다.

탁구공만한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는 길을 걸어 초저녁에 보아둔 러브호텔로 들어섰다.

자정이 넘었으니 내게도 당당하게 숙박할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카운터 쪽문을 노크하며 카드를 내밀고 관리인에게 결재를 요구했다.

“워매, 오늘은 방이 다 차부렀는디 어쩐다요?”

자다 깬 듯한 여인이 미안하다는 듯 열린 쪽문을 다시 닫으며 말했다.

망연자실 그 자리에서 서서 나는 뒤늦게사 깨달았다.

이렇게 눈 오는 밤은 청춘남녀들이 사랑을 불태우기에 너무나 좋다는 걸.

 

 

 

 

 

'名色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자꽃  (0) 2022.01.13
리스크(risk)  (0) 2021.10.02
오징어  (0) 2020.10.19
긍정의 함정  (0) 2020.04.02
울릉도 유감  (0) 2019.06.1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