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은 오징어 말리기 좋은 계절. 남동해안 끝자락 방어진은 매년 가을 오징어가 대풍이었다.

방어진 오징어가 워낙 살이 두텁고 맛있다는 소문에

가을 한철 많은 사람들이 항구로 몰려들어 성시(成市)를 이루었다.

젖먹이를 둔 여인의 유방같이 커다란 집어등 아래 만선으로 돌아온 배들이 쉼 없이 쏟아내던 오징어 궤짝들.

선장도 선원도 벙실벙실 웃었고 하역하는 인부들의 얼굴에도 기쁨이 번질거렸다.

항구에는 비릿하고 달큰한 오징어 냄새가 진동하고 장화 신은 여인들이 부두에 줄 지어 앉아있었다.

 

그녀들은 오징어 배를 따주고 수당을 받는 날품팔이 여인들이었다.

잘 벼린 칼로 생물 오징어를 그 자리에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는데 얼마나 민첩한지

스무 마리 한 상자를 오 분만에 해치웠다.

집에서 작업하기엔 비린내와 시커먼 먹물 때문에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인들의 손을 빌렸다.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말처럼 그녀들은 가을 한철 반짝 특수를 노리곤 부두에서 사라졌다.

그때쯤이면 이미 찬바람 불고 오징어 살집도 줄어 건오징어 만드는 유행도 시들해졌다.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두어 달 동안 방어진 일대는 집집마다 빨랫줄에 오징어가 널려있었다.

아파트 베란다에, 주택가 마당에, 마을 공터에. 그렇게 말려진 오징어는 겨우내 사람들의 간식이 돼주었고,

더러는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내지기도 했다. 내륙에만 살던 나도 오징어 바람이 들어

방어진항으로 몇 번이나 달려갔다. 온 집안에 비린내가 진동을 해도 싫지 않았다.

볕 좋은 날 오징어를 널면 하루 만에 물기가 마르고 꾸덕꾸덕해진다.

수분이 마르면서 몸피가 줄어든 오징어를 반듯하게 펴주면서 다닥다닥 붙은 열 개의 다리도 떼어내야 한다.

이틀만 지나면 반건조 오징어가 되고, 사나흘 지나면 바싹 마른 오징어로 변신하는 오징어가 얼마나 신기했는지

대책 없이 오징어를 사 나르던 시절도 있었다.

휘황하게 불 밝힌 집어등이 가을 바다를 찬란하게 수놓는 모습은 방어진항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유리등이 발하는 빛이 수평선을 불야성으로 만들어 밤바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풍광이 되곤 했다.

 

오징어는 낮 동안에 수심 깊은 곳에 머물다가 밤이 되면 비교적 얕은 수심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이런 습성을 알아차린 뱃사람들이 한밤에 집어등을 내걸고 오징어를 잡는데,

밝은 불빛에 이끌린 오징어들이 배 주위로 몰려들면 오징어잡이 배에서는 수십 개의 낚시가

촘촘히 달려 있는 형광 물질의 인공 미끼를 물속으로 드리워 오징어를 잡는다.

어느 시인은 이런 오징어의 일생을 두고

 

“오징어, 나는 슬픈 사랑의 이름이네

칠흙의 바다 어둠을 밝히는 집어등 빛이 사랑인줄 알았네

차가운 물속까지 들뜨게 하는 그 빛에 눈멀어

사랑의 미로를 찾아 짧은 생애 버렸네.“ 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수산물이 명태와 오징어라는 통계가 있는데

근래 수온 상승으로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자주 먹지 못하는 식품이 되고 말았다.

가을 한철 집집마다 오징어를 말리던 풍경도 사라지고

동해안 곳곳에서 볼수 있던 오징어 덕장도 보기 어려워졌다.

4쌍의 다리와 1쌍의 긴 더듬이 팔을 합해서 오징어 다리를 10개라고 셈하는데,

1쌍의 더듬이 팔은 먹이를 잡을 때나 교미할 때 상대를 힘껏 끌어안는 수단으로 쓴다고 한다.

절대로 놓치지 않을 듯이 그 긴 팔로 끌어안고 교미하는 순간을 상상하니 몸이 절로 더워지는 느낌이다.

 

오징어 하면 먹물을 빼놓울 수 없는데, 이 먹물로 글씨를 쓸 수도 있다.

처음에는 일반 먹물보다 광택이 나고 진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글씨가 서서히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믿지 못할 약속이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을 말할 때 ‘오적어 묵계(烏賊魚 墨契)’라는 말을 쓴다.

말 없는 가운데 성립된 약속을 뜻하는 묵계(墨契)와 오징어(烏賊魚)의 조합이 왠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가을 한철 온 동네에 감돌던 오징어 냄새가 사라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방어진항 날품팔이 여인들이 배를 딴 오징어를 집에서 말려보고 싶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특허공법으로 말린 당일바리 피데기 오징어’같은 화려한 수식어는 없어도

바다를 한 몸에 가득 안은 오징어 그대로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

 

모처럼 방어진 자연부락에 갔더니 제주에서 건너온 1세대 해녀할머니가 빨랫줄 가득 오징어를 널고있다.

몸피를 줄여가는 오징어 위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파리를 쫓으며 할머니가 무심코 내뱉는다.

“이눔들아, 다른 데 가서 붙어. 오징어가 월매나 귀한디 여기 붙어 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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