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집을 나서며 일말의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다. 행여 기다리다 지쳐 가버리진 않았을까.

얼마 전 그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같은데, 그게 언제였는지 아리송하다.

멀리서 그의 기척만 느끼고도 한 달음에 달려가던 때가 있었는데 그의 소식을 귀 밖으로 흘려듣다니, 사랑이 식은 게 틀림없다.

오지도 않은 그를 기다리며 바람 찬 계곡을 서성이던 날들의 열정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문득 보고 싶다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그리워 어젯밤은 잠을 설치기도 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만나지 못했으니 3년만인가.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겠지. 늘 허둥대며 찾아오던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자동차 가속페달에 나도 몰래 힘이 들어간다.

거리는 벚나무들이 온 몸으로 피워 올리는 연분홍 꽃불로 눈앞이 아찔하다.

일 년에 단 며칠 황홀하게 타오르기 위해 살아왔을지도 모르는 벚나무. 꽃이 피기 전에는 아무도 그 존재를 눈부시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습자지처럼 얇은 꽃잎들이 일시에 내지르는 비명에 놀라 밖으로 뛰처나온 사람들은 마구 호들갑을 떨어댄다.

여기저기 축제를 열고 놀이를 즐기며 꽃불이 번져가는 걸 중계방송하고 있다.


꽃구름 아래를 달려 그가 머물고 있을 계곡 근처에 차를 세웠다. 가슴이 두근대며 마음이 바빠졌다.

생각해보니 해마다 그는 벚꽃이 피기 전에 다녀가곤 했던 것 같다. 올해는 벚꽃이  빨리 피었으니 어쩌면 아직 그가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희망고문이 될지라도 그를 보기도 전에 포기할 수는 없다.

가뭄에 드러난 암반과 굵은 자갈길을 건너뛰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를 처움 만났던 날의 설렘과 떨림을 생각하면서.


첫눈에 보기에도 그는 반골기질이 뚜렷하며 날렵한 이미지를 풍겼다.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는 눈빛에 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을 만큼.

그 눈빛에 반해 털썩 주저앉아 마냥 바라보기만 했던 달뜬 가슴. 첫눈에 반해 스토커가 된 나는 그가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곤 했다.

유명 연예인을 따르는 소녀 팬처럼.

햇봄에 처음 만난 그는 초여름 지리산 주능선까지 나를 불러냈다.

아랫도리는 얼룩덜룩한 옷이었지만 형형한 그 얼굴은 산 아래 계곡에서 볼 때보다 더 기품 있고 아름다웠다.

산행을 멈추고 당장 그와 함께 산을 내려가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바람둥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걸출한 외모로 뭇 사람들 시선을 모으며 인기몰이를 하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존재.

누구에게나 신비로운 눈웃음을 보내다 어느날 문득 차갑게 식어 돌아서는 인물.

하지만 나는 일 년에 단 며칠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축복 같았다. 설령 나 말고 다른 사람들 가슴을 뛰놀게 한다 해도 질투나지 않았다.

그는 사유재(私有財)라기보다 일종의 공공재(公共財)였다고나 할까. 유명인들이 한 사람 소유가 되기 어려운 것처럼

그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며 아끼고 사랑할만한 대상이었다. 기꺼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 그렇게도 반색하며 기뻐하고 기다리던 그를 나는 왜 한동안 잊고 있었단 말인가. 지난 몇 년이 내겐 상실의 시기였던가?

권태와 무기력의 시기였던가? 그를 보며 심기일전 살맛이 나던 때도 분명 있었는데.

가뭄으로 수량이 줄어든 계곡에 진달래꽃이 지고 있다. 암벽에 피를 묻히며 추락한 꽃들은 이내 계곡 물을 진분홍으로 물들인다.

처연한 낙화. 눈길을 피하고 싶다. 못 본 척 해주고 싶다.


계곡을 가로질러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이제부터 그를 만날 수 있는 구간이다.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시간이니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을 볼 수도 있겠다

한 발짝 한 발짝 레이저 같은 눈빛으로 길섶을 뒤지며 걸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그의 누추한 옷들이 널려있었지만 어디에도 그의 빛나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한 발 늦었다, 그는 떠나버린 것이다.

나를 기다려주지도 않고, 입었던 옷마저 챙겨가려다 차마 그건 못하였는지 초라한 넝마처럼 두고 갔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그가 남긴 옷에서 떠나버린 날을 되짚어본다. 일주일만 빨리 왔어도 그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산비탈 반그늘에서 시크하게 웃어주던 그와 재회할 수 있었을 텐데. 시절인연이 맞지 않아 안타깝다.

엇갈리는 인연, 올해도 이렇게 또 그를 보내고 마는구나.

얼레지, 그 고상하고 오만한 꽃.

그를 다시 만나려면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한다. 내년에는 그를 볼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기나 할까?

 

 


 

 

 


'名色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긍정의 함정  (0) 2020.04.02
울릉도 유감  (0) 2019.06.18
어떤 출가  (0) 2019.01.28
접산 가는 길  (0) 2018.09.03
안개잡이  (0) 2018.05.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