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을 처음 안 순간부터 설레었다.

대개의 오지들이 그러하듯 마을 주민들만 알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잡목이 우거진 숲과 무수한 자생식물, 그리고하늘을 가리는 그 숲에서 심심찮게 심마니들도 만날 수 있다는 곳.

무명에 가까운 자연에 스며들고 싶어 내 영혼은 목이 말랐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자료가 흔치 않은 영월 접산(835m).

시쳇발로 폭풍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서쪽 마차탄광 쪽으로 트레킹 루트가 새로 생겼다고 한다.

예전에 다니던 임도는 초행자들이 번번이 길을 놓치기 일쑤여서 올 여름 지자체에서 선심을 쓴 모양이다.





내가 만난 여름 중 가장 가혹했던 올해,

여행을 접고 집 근처만 뱅뱅 돌았던 시간이 아깝고 억울해서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기왕이면 먼 곳으로,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곳으로, 야영할 수 있는 곳으로.

접산 가는 길은 쉽고도 어려웠다. 어쩌면 세상 모든 길이 그럴 지도 모르지만.

마차탄광 건너편, 눈앞에 빤히 보이는 새 길을 보고 진입했는데도 들머리를 놓쳐 엉뚱한 길로 차를 몰았다.

세상사 만만하게 볼 일 별로 없다.

길은 뱀처럼 구불구불 경사를 높이며 올라가는데 부분 포장으로 가파르기 짝이 없고

어느 지점에선가 다른 임도와 얽혀 있었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임도, 길섶에 풀이 우거져 가시덤불이 차체를 마구 긁어댄다.

아무래도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 꾸역꾸역 또 올라간다.

5부 능선쯤 왔을 때 외딴집 하나를 만나 염치불구하고 마당으로 들어서 물었더니 접산 가는 길이 맞단다.

팔순 노파의 말을 믿고 다시 차를 몰았으나 길은 7부 능선쯤에서 딱 끊기고 말았다. 누군가의 농장에 닿아있는 길,

가파른 산 위로 풍력발전기가 손에 닿을 듯 가깝다. 귀가 어두운 팔순 노파의 말을 믿은 내가 어리석지 누굴 탓하랴.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깨닫는 순간의 차이라고 한다.

누구나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지만, 고수는 빨리 깨달아 뒤돌아 설 줄 알고 하수는 깨달음도 늦을 뿐 아니라

깨닫고도 미련을 못 버려서 그 길을 계속 간다는 거다.

길에 관한 한 나는 영원한 하수가 분명하다. 인생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몰 시간이 넉넉하다 싶었는데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한 시간을 허비하고 마음이 바빠졌다.

생각해보니 처음에 든 길이 맞다.

광산 입구를 통과해 임도로 이어지는데, 우리는 광산 입구를 무시하고 들머리를 찾고 있었으니.

광산은 광산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드나든다는 생각이 길을 놓친 주범이다.

고정관념만 버리면 살아가는 게 참 쉬운데, 왜 그게 그리 어려운지.

교과서 속에서만 답을 찾고 살아온 사람들의 한계라고나 할까.





결국은 옛길로 접어들어 접산 가는 길을 찾았다.

들머리가 움푹 패고 폭우로 자갈이 휩쓸려 내려와 군데군데 길이 끊어진 험난한 임도.

산악자전거만 가끔 오르내린다는 길은 고도를 높일수록 숲이 우거져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싶은데 옆지기 눈치가 보인다.

일몰이 가까운데 사진 찍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지청구를 들을 수도 있으니까.

사진에 대한 갈망과 정상에 대한 갈망 사이를 오가며 숲길을 달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발아래 생각지도 못한 풍광이 나타났다.

겹겹이 둘러선 산줄기 사이로 굽이치며 흘러가는 동강! 연못에 빠진 보석 한 점처럼

골짜기 사이에 황홀한 얼룩으로 빛나는 동강!

감개무량이란 단어가 이럴 때 적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들머리를 놓쳐 허비한 시간과 위험을 감수하며 올라온 시간들이 상쇄되는 순간.

기우는 햇살은 8부 능선 위로만 빛이 남아있고 음영이 짙은 산들은 오묘한 입체감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듯 황송해서 나는 허겁지겁 셔터를 눌렀다.

산 위에 더 멋진 풍광이 있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정상은 그리 멀지 않았고, 조망은 강원도 여느 산들처럼 탁 트여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산, , . 무엇보다 아무도 없다는 게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기를 쓰고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와 실크스카프처럼 부드러운 바람,

푸른 화선지에 마음대로 붓을 놀리는 구름과, 저무는 해가 만들어낸 황혼.

산 위의 하룻밤을 위해 달려온 먼 길과, 잘못 든 길과, 문득 나타난 정경이 접산의 조망으로 집결되어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 밤도 잠들긴 틀렸다.

접산은 돌리네 현상(doline 카르스트지형의 특징에 해당되는 오목지형)으로

땅이 꺼지면서 산줄기가 겹쳐진 형상으로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겹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강 지류를 따라 골골 첩첩한 산들 사이로 안개가 피어오르는 장관을 두고 뒷날 산을 내려오기가 망설여졌다.

여기 다시 오기는 힘들겠지. 나는 점점 나이 들고, 장거리 운전이 힘들어질테고.

지금까지 그랬듯 언제나 길을 놓치곤 뒤늦게 후회하거나 돌아서지 못할 지점에 닿아 있겠지.

잘못 접어든 길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만날 수도 있지만 생의 대부분을 엉뚱한 길에서 허비한 자신이 서글프다.

나는 아직 길을 찾지 못했나? 내가 정말 걷고 싶은 길이 있기라도 했던가?

영원한 길치로 지도에도 없는 길을 찾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名色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절인연  (0) 2019.04.07
어떤 출가  (0) 2019.01.28
안개잡이  (0) 2018.05.20
재회  (0) 2018.03.01
해바라기  (0) 2018.01.0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