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가 출현했다.

간간이 옷자락 스치듯 슬쩍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더니, 마침내 뭍에 오르기로 결심했나 보다.

멀리 보이던 해송 숲이 없어지고, 근처 사물들이 지우개 지나간 자리처럼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이런 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앉아서 안개를 맞이하기보다 안개를 잡으러 나가야 한다.

차가운 바다의 입술로 육지의 따뜻한 볼을 부비며 부끄러운 듯 베일을 드리우는 해무를 가까이 더 가까이 보고 싶다.

내륙의 안개가 은밀하고 몽환적이라면, 해안의 안개는 농염하고 도발적이다.

해풍이 밀어낸 안개가 뭍으로 진군하는 모습은 가히 위협적이다.

해안선을 점령하고 육지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먹어치우는 모습이 소름 끼친다.

형체 없는 수증기가 구름을 이루듯 해무는 잠깐 사이에 육지를 가두고 그의 포로로 삼는다.

그가 스스로 떠날 때까지 아무도 그를 벗어날 수 없다. 나쁜 남자인줄 알면서도 끌리는 것처럼 나는 번번이 안개에 매료되곤 한다.

입은 옷 채로 카메라를 챙겨 해무를 만나러 나간다.

나쁜 남자의 휘파람 소리에 끌려 담장을 넘는 처녀처럼 내 가슴은 마구 요동친다.





다급한 마음으로 안개를 잡으러 방파제로, 마을로, 숲길로, 해안으로 헤매다니며

나는 고기잡이도 바람잡이도 아닌 안개잡이가 된다.

카메라 하나로 안개의 심장부를 노리는 안개잡이. 국어사전이 허용하지 않는 낱말로 나를 규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안개가 먹어버린 바닷가 마을은 정복자의 발아래 고요하게 엎드려 있다.

그물을 거두러 바다로 나가려던 어부는 일찌감치 돌아와 아침을 먹고 있고, 정박한 배들은 뱃전 가득 해무를 싣고 있다.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통발에도, 낮은 지붕 위에도, 생선과 빨래가 함께 널리는 빨랫줄에도 안개가 지키고 있다.

나는 안개가 지운 것들을 증명하듯 사진을 찍는다. 안개의 실체를 인증하는 것은 사라진 것을 담는 것 아니던가.

화려하거나 누추하거나 혹은 과장되게 빛나던 것들은 사라지고 무채색에 가깝게 평준화가 되는 풍경.

잡다한 선과 면과 색이 사라진 풍경 속에서 모든 존재가 평등해지는 느낌이랄까.





바닷가 근처에 자리잡은 조선소 작업장도 안개가 접수해버렸다.

크레인이 바쁘게 오가고, 철판에서 용접불꽃이 튀어 시선을 돌려야했던 때가 있었는데,

텅 빈 작업장에는 바퀴가 내려앉은 트럭에 안개만 가득 쌓여있다.

일자리를 찾아왔던 사람들이 떠나고 동네는 안개만 남아 둥지를 틀고 있다. 원룸, 투룸, 그 많은 방들도 전부 안개가 차지하고 있을까.


문득 수평선이 사라진 바다를 바라본다.

하늘과 바다가 접속한 공간엔 오래전에 사라진 유령선이 하나 둘 나타나고,

방파제를 지키던 등대는 귀신고래 울음 같은 무적(霧笛) 소리를 흩뿌린다.

미욱한 나는 안개를 잡아 카메라에 가두며 백사장을 걷고 몽돌밭을 홀로 헤맨다. 때론 돌부리에 걸리고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

생각해보니 내 살아온 날들이 안개잡이 같다.

가까운 듯 멀리 있는 걸 잡으려고 허위허위 달려갔고, 다가갈수록 멀어져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걸 염원했다.

사실 그 몽매함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실체도 없는 그리움을 안고 어딘가를 한없이 헤매는 몹쓸 병을 앓아온 세월.

 바람구두를 신고 머나먼 곳을 찾아나서는 마음의 방랑벽. 언제쯤이면 이 병이 치유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태생적으로 안개잡이였는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안개 낀 바닷가에서 기이한 장면을 만난 적이 있다.

처음엔 정신질환자의 해프닝인줄 알고 발을 멈추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모른 척해주었다.

삼각대에 스마트폰을 올려놓고 동영상을 찍고 있던 그는 안개 속에서 1인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잡은 고기를 카메라 앞에 들이대며, 오늘의 조황과 낚시정보를 열심히 피력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뭔가에 홀린 듯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혼자 신이 나서 떠들고 있는 사람, 누가 앞에 있는 것처럼 과장된 몸짓까지 곁들이는 모습이 어릿광대 같아 우스웠다.

그러나 돌아서 생각하니 그 어릿광대는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니던가!

내 기분에 빠져서, 내 생각에 빠져서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헤매며 안개를 잡으러 다니다니.

누군가 나를 본다면 정신질환자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게다. 사람은 누구나 아는 만큼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이른 아침, 썰물이 진행되는 바닷물 속에서 조개를 잡고 있는 한 남자를 본다.

허리까지 오는 물속에서 삽으로 모래를 퍼면 그 속에 조개가 몇 마리씩 나오는 모양이다.

얼추 육십이 넘어 보이는 얼굴은 안개 속에서도 검게 그을려 있다.

안개 낀 날을 골라 조개잡이에 나선 남자는 혹시 자신에 일생에 부끄러움을 갖고 사는 건 아닐까.

안개를 핑계로 길을 나서곤 하는 어떤 안개잡이처럼.





해무가 출현하는 유월부터 여름 한 철, 나는 카메라 가방을 현관 앞에 내놓고 지낸다. 안개가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가려고.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고 탁 트인 시야는 우주처럼 넓고 깊고 아득해지는 날,

안개잡이는 황홀한 방랑을 위해 전화기도 꺼버리고 홀로 길을 나선다.

이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좋다. 어차피 인생은 편도여행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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