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한쪽 신발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이 골목 저 골목 찾아다니다 맨발에 유리 조각이 찔려 꿈에서 깨어났다.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여서 나도 몰래 발바닥에 손이 갔다. 이게 뭐지? 무슨 꿈이지?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은 흉몽이라고 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거나 파경, 파탄 등을 예견한다고 알려져 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본다.

혹시 와병중인 동생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요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일이라 가장 먼저 생각이 떠오른다.

 

신발을 얻는 꿈은 자수성가를 의미하며 신발이 찢어지는 꿈은 사고나 질병을 예견한다는데

하필이면 왜 신발을 잃고 헤매는 꿈을 꾸었을까.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부르르 진저리를 친다.

인체의 가장 밑바닥을 받쳐주는 신발은 하루종일 주인을 모시고 다니다가 어둡고 습한 구석에 처박히곤 한다.

옷이나 가방처럼 안방에서 귀한 대접도 받지 못하고 현관 앞에서 밤을 지새기 일쑤다.

패션의 마침표가 신발이라는 말도 있지만 역할에 비해 늘 푸대접받는 건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오해는 또 얼마나 많이 받는가. 신발을 선물하면 연인이 떠난다는 둥, 헤어진다는 둥.

예전엔 군대 간 남자가 변신한 여인에게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고 했는데

요즘은 ‘군화를 거꾸로 신었다’는 말이 남자 쪽 배반의 상징이 되고 있다.

 

얼마 전 결혼식을 앞둔 조카가 예비신랑에게 맞춤 정장을 선물하면서

구두만은 선물하지 않겠다고 해서 웃었던 일이 있었다.

신발을 선물하면 신랑이 달아난다는 속설이 있는데

아무리 옛날 얘기라지만 나쁜 징크스는 피해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조카의 간절한 마음을 느끼긴 했지만

최첨단 인공지능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싶어 혼자 속으로 웃었다.

속설을 믿고 따르는 것보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게 현대여성에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이 신발을 신고 나에게 오라’고 할 수도 있고

신발 안에 꽃을 가득 넣어 ‘꽃길만 걸으소서’라고 빌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쩜 조카는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신발에 대한 일화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인도의 간디와 미국 부시 대통령이다.

기차에서 벗겨진 신발을 주우러 가지 않고 나머지 신발을 마저 벗어던진 간디의 얘기는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고, 부시가 당한 신발 테러 사건은 지구촌 곳곳에 해외토픽으로 널리널리 퍼졌다.

이라크를 방문한 조지 부시에게 신발을 던진 사람은 기자로서 이라크국민을 대표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이라크인들의 분노를 보여주었다.

그 뒤부터 이라크에선 신발이 ‘반미’(反美)의 상징이 되었고,

신발을 던진 기자는 이라크의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조지 부시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이라크의 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국민은 사분오열되었으며, 이라크인 10만 명이 죽었으니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직립보행의 인간에게 꼭 필요한 신발은 쓰임새 이상으로 많은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떠남’의 이미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병상에 누운 사람들에게 신발은 각별하다.

침대에 누워서도 절대 신발을 치우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오래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의 남편은 병상에서도 신발을 눈 앞에 두고 지냈다.

신발을 신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그만큼 컸던 것일까,

그는 밤에도 신발을 끌어안고 잤다. 삶에 대한 애착이 신발에 끈질기게 담겨있었던 것이다.

 

몇년 전, 여든을 앞둔 시누이가 오랜 와병 끝에 요양병원으로 들어갔다.

고관절을 다쳐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더니 기어코 소대변도 받아내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지경에 이르렀다.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간병인이 울면서 전화를 했다.

“환자분 신발을 치웠더니 화를 내면서 물건을 마구 집어던졌어요.

날더러 어서 죽으라는 말이냐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개똥으로 굴러도 이승이 낫다더니, 몰핀을 맞으면서도 살고싶었던 시누이.

신발을 치우면 빨리 죽는다는 징크스라도 갖고 있었을까.

그 심정도 모르고 청소하느라 신발을 치워버린 간병인은 죄인이 되어 병실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발이 편해야 세상이 편한 것처럼 인체를 위해 편안한 보호장구가 되어주는 신발이

어쩌다 배반과 이별의 상징이 되었을까.

사람을 위해 헌신한 신발을 그야말로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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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봄 바다를 보러 자주 나간다.

겨우내 적막했던 해변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마음이 다급하다.

겨울 바다를 찾는 방랑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겐 왠지 눈길 주기가 미안해 모른 척 지나쳤다.

고독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는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하지만 봄 바다는 다르다. 초록이 짙어가는 물빛과 어서 오라고 부르는 듯한 파도,

갯바위에 붙은 해초류에 생기가 돌고 갈매기의 비행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이때쯤이면 해변에서 만나는 방랑자들이 동족처럼 반갑다.

 

해변의 봄은 미역 냄새와 함께 온다.

물가에 다다르기도 전에 훅 끼치는 미역 냄새. 비릿하고 향긋한 그 냄새에 오감이 활짝 열리고 군침이 돈다.

아니나 다를까 해변에는 미역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동네 아낙들이 둘러앉아 미역줄기를 골라 발에 너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배로 건져온 미역들을 다듬어 가지런히 널어서 햇볕에 잘 마르게 비스듬히 세워둔다.

햇볕이 좋으면 사흘만에 마른 미역으로 변신하는 물미역.

그러나 가만히 두어도 절로 마르는 게 아니라 수시로 뒤집어주고 보살펴야 상품이 된다.

겨우내 일거리가 없어 지루했던 아낙들이 모처럼 일당 챙기는 봄날. 수다는 덤으로 따라온다.

창 넓은 모자로 햇볕을 가리고 마스크까지 꼈지만 살아온 세월이 있어 어둔한 말도 눈치코치로 알아듣는다.

 

“자, 미역 귀다리 하나 묵어보소.”

때론 생미역 한 줄기, 때로는 미역귀 하나를 이방인들에게 쥐어주기도 하는 아낙들.

차마 먹고 싶단 말을 못했던 사람들은 횡재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서 넙죽 받아먹는다.

쫄깃하고 향긋한 맛. 바다를 품고있는 짭쪼롬한 맛이다.

해안가 마을을 돌아 봄바다 순례를 하고 돌아오는 길, 몽돌밭에 미역을 널고 있는 여인을 만난다.

파도에 떠밀려온 미역을 주워 말리는 것이 집에서 먹으려나 보다 했는데 찾는 사람이 있으면 팔기도 한단다.

해변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꾸려나가는 그녀는 낚시 미끼와 라면, 과자 등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해풍에 검게 그을린 피부, 파마가 풀려 산발이 되다시피한 머리.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옷과 무릎까지 오는 장화.

그녀는 몽돌밭에 퍼질러 앉아 미역을 뒤집어주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알고 지낸 지 오래지만 서로 깊은 얘기는 나누지 않는 사이.

어쩌다 한번 마주치면 ‘잘 지내죠?’ 한 마디로 안부가 끝나는 사이.

서로 류(類)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건성으로 알고지냈다고나 할까.

“못 본지 이태나 됐네요. 집안엔 별일 없고?”

작정하고 다가앉아 그녀의 작업을 도우는 척 말을 걸어본다.

가끔 지나치는 그녀의 가게가 오래도록 문이 닫혀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구멍가게를 접은 것도 같다. 소일거리 삼아 푼돈 벌어 쓴다던 여자가 왜 가게를 접었을까?

 

지난 겨울 남편이 황천길로 가버렸다고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미워했지만 결코 죽기를 바라진 않았는데 병을 얻어 가버렸다고 한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그녀에게 남기고.

바다 사나이였던 남편은 밖에 여자를 두고 있었다. 처음엔 몰래 만나다가 나중엔 아예 두 집 살림을 했다.

남편이 이혼을 원했지만 그녀가 허락해주지 않았다. 남편을 뺏긴 여자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게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 홀로 계시던 시어머니가 노환을 얻어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몸피가 줄어 검불처럼 가벼워진 노인을 안고 울었다.

밥을 씹어 시어머니의 입에 넣어드리고 식어가는 몸을 자신의 체온으로 안아서 데웠다.

점차 생기가 돌아온 노인을 바닷가 집으로 모시고 와서 보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딴살림하던 남편이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양심이 남아있었는지 아내는 버려도 어머니는 버릴 수 없었던 건지.

 

낮은 지붕 아래 소박한 꿈을 일구며 살던 그녀가 우여곡절 끝에 얻어낸 평화는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바깥 여자와 살면서 얻은 병이 남편을 친 것이다.

무쇠 팔 무쇠 다리를 자랑하던 남자는 중증 치매의 어머니를 남기고 석달을 앓다 떠나버렸다.

그녀는 가게를 접었다. 어떤 생계수단도 그녀에겐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아이 같은 노인을 보살피며 바닷가에서 해초를 주워 말리는 일이 이제 그녀의 일상이 되었다.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현대판 같다.

천신만고 끝에 잡은 고기는 상어 밥이 되고 마침내 빈 배로 돌아온 노인,

사랑을 찾아 떠난 남편이 돌아왔으나 불귀의 객이 되고 끝내 홀로 남은 그녀.

봄 바다를 보러갔다가 ‘노인과 바다’를 보고 온 느낌이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상어에게 고기를 뺏기고 빈 배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를 모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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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병원 뒷골목에 그 가게가 있다. 상호는 다방으로 붙여놓고 칼국수와 커피를 함께 파는 집.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메뉴에도 불구하고 골목식당의 지리적 조건 때문인지 이외로 단골손님이 많다.

진한 멸치국물에 감자와 호박을 듬뿍 넣고 끓여낸 칼국수는 투박하고도 깊은 맛을 낸다.

테이블이라곤 네 개가 전부, 옛날 다방을 인수해 식당으로 개조한 실내는 90년대 시골 다방 분위기다.

늙은 기생처럼 나이 칠십에도 화장을 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마담과 촌스러운 조명등.

낡은 레자소파에 몸을 묻고 칼국수를 먹는 기분은 좀 특별하다.

번화가 뒷골목에 이런 집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해서일까.

가게 이름과 메뉴가, 주인 이름과 실내 분위기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집에 내가 단골이 된 지도 오래다.

목필균 시인이 ‘명자야 명자야 부르면 시골티 물씬 나는 명자가 달려 나올 것 같다’고 노래한

마담 명자언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청순해 보여서 아가씨꽃이라 불리던 명자꽃처럼

너무 순진해서 꺾여버린 그녀의 일생이 아프게 떠오른곤 한다.

 

눈부시게 희고 예뻤던 명자는 철모르던 시절에 남자에게 납치를 당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던 거래처 상인에게.

트럭에 물건을 싣고 납품하러 오곤 하던 남자를 삼촌 삼촌하며 따랐는데,

어느 날 명자를 차에 태우고 종적을 감춰버린 것이다.

막 초경을 시작한 나이의 명자는 한 번도 남자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삼촌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혀

그의 육체적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일찌감치 상처하고 전국을 떠돌던 장돌뱅이 남자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첩첩산골로 숨어들어 명자와 살림을 차렸다.

이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짓밟고 뭉개 자신의 탐욕을 채우면서도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달래고 위하고 겁주면서 서서히 길들였다.

“너도 내가 좋아서 따라온 거잖아. 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야.”

그는 명자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며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갖다 바쳤다.

명자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외동딸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실종자 전단을 뿌리고 수소문한 끝에 명자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선 아버지를 보고 그녀는 멍하니 바라보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반가움에 앞서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보다 배은망덕한 죄인이라는 생각에 어쩔 줄 몰랐다.

의형제까지 맺을 정도로 믿었던 사람에게 딸을 뺏긴 아버지는 울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다가

끝내 명자의 부른 배를 보고 주저앉았다. 경찰서에 끌고 갈 생각으로 결박 도구까지 준비했던 아버지는

모들 걸 포기하고 남자를 사위로 인정하고 말았다.

 

아버지뻘 남자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살면서 그녀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삶이면 몰라도 마지못해 끌려가는 삶이 갈수록 누추하고 불행한 생각이 들었다.

둘째 아이가 지적 장애만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집을 뛰쳐나왔을지도 몰랐다.

아픈 아이를 두고 차마 엄마이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그녀는 그렇게 한 남자의 인질로 잡혀

30여년을 살아냈다. 자식들에게 한 번도 아버지의 부도덕과 폭행을 발설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영원히 비밀로 묻어두려 했던 남자의 만행은 그에게 새 여자가 생기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남자는 철면피처럼 냉정하게 말했다.

“너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여자야. 지금까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어?

마지못해 잠자리에 응해준 거잖아. 도망가고 싶은데 억지로 살았잖아.”

 

명자는 그 한 마디에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꼈다.

무섭고 싫었지만 참고 살았는데, 아이들이 독립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 남자는 나를 꿰뚫어보면서 복수를 꿈꾸고 있었구나.

명자는 모든 걸 버리고 집을 나왔다.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큰 아이가 오히려 엄마를 응원했다.

엄마, 지금이라도 엄마 인생을 사세요. 우린 알아서 잘 살게요.

어차피 우린 모래알처럼 흩어지기 위해 살아온 가족이었어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식당 보조, 간호 보조, 장애인 보조, 요양보호사 등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시루떡만한 방 한 칸 마련하고 마침내 자신의 가게를 갖게 된 것이 그녀의 이력이다.

도시의 뒷골목 대여섯 평짜리 가게에서 수제비를 끓이고 커피를 팔면서

그녀는 70평생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날은 없었다고 말했다.

 

‘사랑도 명자꽃 같은 것이리라.

흔해빠진 이름으로 다가왔다가 가슴에 붉은 멍울로 이별을 남기는 것이리라.’ <목필균 ‘명자꽃’ 中>

다닥다닥 붙은 꽃망울로 촌스럽게 피었다 지는 명자꽃,

‘평범, 겸손’이라는 꽃말이 명자언니와 많이 닮았다. 더 이상 곱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한때 우유 미인으로 소문났던 그녀를 만나러 가끔 병원 골목으로 접어든다.

“언니, 여기 칼국수 두 그릇!”

오늘 점심은 명자언니와 행복한 겸상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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