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까다로운 존재다. 차갑고 오만하고 도도하기 이를 데 없다.
이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 내게 온전히 안겨오지 않는 그를 볼 때마다 나의 어리석은 짝사랑에 한숨을 쉰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만나자마자 그를 휘어잡아 내 것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땐 젊었으니 내 감각이 그를 쉽게 사로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처음부터 그를 쉽게 본 게 잘못이었을까. 남들이 그를 편하게 대하기에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주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상냥한 음성을 들려주던 그가 참 만만해 보였다.
그는 주인이 이끄는 대로 때론 감미롭게, 때론 슬프게, 때론 격렬하게 반응했다. 한 순간 엑스터시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모두 그의 주인에게 환호하고 찬사를 퍼부었다.
그는 모든 공로를 주인에게 돌리고 다소곳이 자리를 지켰다. 언제라도 주인이 부르면 달려와 안길듯한 자세로.
그는 주인의 연인이라기 보다 종복(從僕)과도 같았다.
그를 본 후 수시로 그를 갈망했다. 나도 부담 없이 그를 즐겨보고 싶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고도 싶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에게나 안길 수 있는 존재로 보였으니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구애를 퍼부었고 손아귀에 넣었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걸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았다.
나도 그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무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를 가볍게 여기고 품에 넣었던 게 실수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는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상냥함은 온데간데없이 어디 해볼테면 해보라는 듯이 냉랭하게 굴었다.
그를 만지기 위해 손톱을 짧게 자르고 부드러운 융으로 그의 목을 문질러주었지만 그런 정성 따위는 본체만체 했다.
내가 그를 길들이는 게 아니라 그가 나를 길들이려는 느낌을 받았다. 주제넘게도!
그와 친밀해지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봤지만 그는 쉽게 곁을 주지 않았다.
곁에 두고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 하인 같았다.
내게 까칠한 그에게 굳이 시간과 열정을 쏟을 이유가 있을까? 어느 날부턴가 점점 그가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기울이는 정성에 화답하는 기색도 없고, 관계가 진전될 기미도 없어 보이는 그에게 짝사랑을 퍼부을 필요가 있을까?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를 부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도처에 유혹인걸.
나는 드디어 그와 냉전에 돌입했다. 참을성 없는 내가 까칠한 그를 멀찍이 밀어내버린 것이다.
눈에 보이면 더 불편할 것 같아 응달진 뒷방으로 추방하고는 잊어버렸다. 아니, 잊은 척 몇 년을 지냈다.
그러나 가끔 잠 못 드는 밤이면 그가 그리웠다.
그의 투명한 울림이 귓전을 때리며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자고 나를 다그쳤다.
좀 까다롭긴 해도 어려운 고비만 넘기면 서로 화해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첫눈에 반해 만났다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고 물러서고, 또 다시 다가갔다 어려워 뒤돌아서길 몇 번쯤.
이제야 조금씩 그의 실체가 보이는 것도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본색을 깨달았다는 게 옳겠다.
나는 지금까지 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고, 노력도 인내도 부족했다. 사랑하기 위한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다.
가볍게 즐기려던 그 마음부터 잘못된 생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쉽게 넘보지만 백 명 중에 한 명쯤 살아남는다고 한다.
호기롭게 시작했다 용두사미로 끝나는 사람, 객기 부려보다 어려워서 끝내 접는 사람 등등.....
끝까지 그와 동행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악기, 이십여 년 전에 시작한 기타를 요즘에 다시 잡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하다가 올 겨울 비로소 그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제는 그가 아니고 나였다는 걸 인정하고 나를 낮추니 비로소 그가 제대로 보였다.
가늘고 긴 모가지 아래 여체를 닮은 곡선의 울림통을 지닌 그는 무궁무진한 소리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밝고 경쾌한가 하면 은은하고도 우아하며, 화려한가 하면 중후하고 깊은 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나 그 소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피아노처럼 건반만 짚으면 제 소리가 나는 게 아니라
정확한 운지와 타법이 아니면 둔탁한 음을 내며 히스테리를 부린다.
여섯 줄이 평행선을 이루며 나란히 묶여있지만 서로 간섭을 싫어해 손가락이 겹쳐 닿는 걸 용서하지 않는다.
명징한 소리를 얻기 위해서는 절대 다른 줄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참 까다롭고 오만한 악기다.
오래 쉴 때는 줄을 풀어놓아야 하며, 연주할 때마다 정확한 조율로 비위를 맞춰야 하고 습도에 따라 세심하게 보살펴야 한다.
장난감처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알고 보면 어떤 악기보다 섬세하고 오묘하다.
작곡의 기초가 피아노와 기타라고 하지 않는가.
오래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못 본 게 미안해서 요즘 성실하게 그를 대하고 있다.
진지하게 노력하고 진심으로 사랑을 쏟는다.
침대 곁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어루만지며, 아무리 바빠도 한 두곡은 연주해본다.
그는 떨리듯 반색하며 내 손가락을 부드럽게 받아들인다.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오가는 느낌은 때로 사람보다 낫다.
음악이 주는 위안은 이 세상 어떤 명언이나 명문보다 훌륭하다.
요즘 잠이 줄어들어 깨어있는 시간이 많은 게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든다.
기타를 안고 불면의 밤을 순식간에 흘려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시력감퇴와 더불어 산만해진 정신 때문에 책 읽기도 어려워진 나이에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기타가 내 정신을 일깨우는 것 같다.
오랜 기간 냉담했던 그와 화해했으니 이제 낡아가는 내 감성을 되찾아야겠다.
그를 나에게 맞추려던 생각은 버리고 오로지 내가 그에게 맞출 일이다. 그가 나를 받아만 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