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한 시의 산정은 바람이 점령했다.

잠은 달아난 지 오래고 텐트를 날려버리겠다고 호령하는 바람소리에 공포마저 느껴진다.

아늑하게 자고 싶어 텐트 위에 타프를 쳤더니 바람이 얼마나 펄럭대는지 다른 날보다 유난히 시끄럽다.

지금이라도 일어나 타프를 걷을까 싶다가 야심한 시각에 부스럭대는 게 망설여져 웅크리고 있다.


오늘 정상에는 이외로 야영하는 사람들이 몇 없다.

산 정상까지 차로 오를 수 있고, 넓은 데크에다 식수와 화장실까지 겸비한 곳이라 우리 자리가 있을까 염려했었다.

늦게 가면 텐트 칠 자리가 없을까봐 해가 기울기도 전에 부랴부랴 올라왔더니 데크에는 1인용 텐트 한 동만 오두마니 앉아있었다.

두꺼운 잠바를 입고 바람과 맞서 텐트를 치고 나니 5월 초이틀 달이 매직아워의 푸른 하늘에 실눈썹처럼 걸려있다. 싸늘한 눈초리다.

깊은 잠에 빠진 친구를 깨우지 않으려고 잠든 척 누웠다가 침낭을 둘러쓰고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 쓰는 것만큼 시간이 잘 가는 것도 없으니까.

사실 모든 여행은 오기 전에 검색하고 지도 보고 준비하는 과정이 삼분의 일쯤 된다.

나머지는 직접 몸으로 느끼고 후기로 남겨두는 것이라고나 할까.

사진이든 글이든 기록으로 남겨 반추하는 일은 두고두고 즐겁다. 그 즐거움은 때로 일행이나 시간에 비례하기도 한다.


옆 침낭의 친구는 며칠 후 지리산 종주를 떠난다. 열다섯번 째의 지리산 종주다.

10KG이 넘는 배낭을 지고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KM를 걷는다니 우리 나이에 무리 아닌가 싶어 걱정이다.

한때 산행 파트너로 산을 펄펄 날아다녔지만 한 사람은 1대간 9정맥을 마친 산꾼으로, 한 사람은 낮은 산도 겁을 내는 겁보가 되어 있다.

오늘 야영은 나를 위한 그녀의 배려다. 무릎 수술 이후 등산을 함께 못한 지도 몇 년이던가.

장거리 산행이나 야영을 다녀오면 그녀는 내게 보고서 쓰듯 자랑을 하곤 했다.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들어줄 수도 없는 이야기에 나는 늘 부러운 찬사를 보내곤 했다. 그러다 마침내 둘만의 야영이 이루어졌다.


하동 금오산(875M),

산 꼭데기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조망이 탁월하다는 점에서, 주변 볼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낙점을 받았다.

그러나 볼거리는 양념이었고 둘이 산정에서 밤을 보낸다는 게 마냥 가슴 설렜다.

북천역의 화려한 양귀비밭도, 고소산성에서 바라보던 평사리 넓은 들판과 섬진강의 은모래도,

벚나무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던 칠불사까지의 드라이브길도 전주곡에 불과했다.


산 아래는 때 이른 폭염이 기승인데 산정은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공기, 거기 이제 막 피어난 찔레꽃이 주위를 하얗게 밝혀주고 있었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도 제멋대로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운 찔레꽃은 텐트속에서도 향기가 느껴진다.

발 아래 다도해의 아기자기한 섬들, 새끼 손톱만큼 작은 집들과 모내기가 시작된 무논과 먼 산그리메.

그 풍경 속에서 오래 사귄 친구와 하룻밤을 같이 잔다는 건 축복 아닌가.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위안이 되는 친구라서 더욱.


문득 밝은 기운이 느껴져 눈을 뜨니 다도해 저 멀리 해가 떠오르고 있다.

눈부신 아우라를 거느린 태양이 만물을 압도하는 모습은 볼 때마다 감동이다. 해를 보러 나온 사람들마다 환희에 찬 얼굴이다.

세상살이 번뇌에 지친 사람들도 이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면 살아갈 힘이 생기리라. 희망이 솟으리라.

데크 안쪽에 맨 먼저 텐트를 친 사람은 일출 사진을 찍기 위해 혼자 올라왔다고 한다.

럭셔리 텐트로 별장같은 분위기를 꾸민 50대 부부는 주말마다 둘만의 야영을 즐긴다고 한다.

아이를 거느리고 온 부부는 일찌감치 아이들에게 대자연의 신비와 아웃도어의 즐거움을 가르쳐주고 싶어 데려왔단다.

세상 살아가는 모습이 다 다르듯 산정에 올라온 이유도 모두 다르다.

나와 다른 이유로 야영을 왔다고 해서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도 없고 장비가 호화롭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없다.

산 위에서 잠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이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저자거리에서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과는 정서가 다르기 때문일까.


아침을 지어 먹고 배낭을 꾸려 자리를 떠나는데 50대 초반의 여인이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친다.

왕언니들, 짱이에요!”

그러고 보니 7동의 텐트 중 우리가 제일 나이 든 축에 속했던가 보다. 벌써 우리가 나이대접을 받을 때가 됐나?

순간 부끄러웠다가 이내 자랑스럽다. 집에서 손주들 볼 나이에 3시간을 달려와 산정의 밤을 보내고 가볍게 내려간다.

젊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 이 아니 즐거운가!


친구여. 나 죽으면 화장하여 어느 산정에서 뼛가루를 뿌려다오. 번거로운 장례 절차도 필요 없고, 조문객도 가족들이면 충분하다.

내 혼백은 바람에 날려 지구를 떠나 무시무종의 우주로 사라지리라.

아니온 듯 다녀가고 싶었지만 남아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겠네.

언제라도 부르면 가야할 우리 목숨,

누가 먼저 불려갈지 모르는 일.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미리 유언 하나 남겨놓은 것도 좋은 일 아닐까.

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산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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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힘겹고 지쳐있을 때 용기를 주는 낱말로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있다.

역경을 헤치고 나온 사람들의 일화에 잘 따라붙는 이 사자성어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쯤으로 알려져 있다.

진정 고난이 다하면 즐거움이 오는 것일까, 괴로움의 끝에는 반드시 행복이 있는 것일까. 나는 가끔 회의적이다. 아니, 자주 의심하고 반문한다.

인과응보가 철칙이 아닌 것처럼 고진감래도 그저 듣기 좋은 말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닐까. 마치 쓴 약을 먹기 좋게 당분으로 포장한 알약처럼.


고진감래라는 당의정을 믿고 팔십 평생을 살아오신 이모님이 얼마 전 외아들을 잃었다.

위로 누나 셋을 둔 마흔세 살의 외아들. 아직 미혼이었고 혼자 객지에서 직장생활 하다가 출근길에 쓰러져 그대로 가버렸다.

그는 팔순 노모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집안의 기대주였다.

외가에서 큰딸이었던 내 어머니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이모는 마음씨, 솜씨, 맵씨 좋기로 근동에 소문이 자자했었다.

어린 시절 이모가 만들어준 원피스를 입고 나가면 온 동네 아이들이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양장점에 일하러 다니면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조카들 옷을 지어주고 느티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어주던 이모.

그 이모의 일생은 한 마디로 감진고래(甘盡苦來)였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달콤했지만 남편을 잘못 만나 쓰디 쓴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이모는 친정 부모에게 누가 될까봐 힘든 내색도 없이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백수건달이나 다름없는 남편을 대신해 방직공장에 다니며 4남매를 키운 이모는 큰딸에게 기대가 컸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믿고 큰딸이 어서 자라 동생들을 건사하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빚을 내서 공부시킨 큰딸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집을 가버렸다. 둘째딸도 셋째딸도 이모에게 결코 살림밑천이 되지 못했다.

이모는 평생 방직공장 노동자로 살았고, 노후에는 둘째딸 가게를 도와준답시고 굽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 외아들이 결혼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여자가 이 집안에 들어와 어머니의 고난을 감싸주고 위로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이모는 너 좋아하는 여자 만나면 된다. 나는 너한테 짐 되기 싫다.” 무수히 말했지만 아들의 귀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을 게다.

이모는 세 딸에게 받은 실망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고 고통과 환란 속에서도 늘 희망을 이야기했다.

큰 사위가 파산을 해서 교직에 있는 딸의 월급까지 차압이 들어왔지만 사위를 원망하지 않았고,

작은 딸이 학교 앞에 문방구점을 차려 어린아이를 맡겼어도 말없이 거두어주었다.


시집보낸 딸들의 뒷바라지까지 알뜰하게 해주며 치매 초기의 남편을 수발하던 이모.

몸피가 줄어 한줌이나 될까 말까한 그 이모는 어떤 상황에서도 고진감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생 끝에 낙이 있을 거라고, 세상에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고 믿던 보살이었다.

그 보살의 마지막 희망에 작살을 꽂은 것은 누구일까, 무엇 때문일까. 왜 이모는 감진고래를 넘어 고진고래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세상사 인과응보도 믿을 바 못되고,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자신만의 숙명이 있는 건 분명하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카르마(Karma, )라고 풀이한다.

착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악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은 현생뿐만 아니라 전생의 행위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윤회를 전제한다면 이 말이 맞는다고도 할 수 있지만, 나도 모르는 내 자신의 과거에 대해 왜 내가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아야 하는가?

기억에 남아있지도, 검증되지도 않은 전생의 대가를 하필이면 왜 지금 내가 다 받아야 하는가 말이다.


전생에 죄가 많아서이모는 자주 그런 말을 했다.

거듭되는 불운이 남의 탓이 아니고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 힘없고 착한 사람들은 그렇게 슬픈 운명에 복종하고 끌려가게 되어있는 것일까.

외아들을 잃고도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는 이모를 보며 아픔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아무리 힘없는 사람이라도 일생에 한번쯤은 행복해야 하지 않는가?

살다보면 감진고래의 세월을 맞을 수도 있겠지만 끝끝내 고진고래(苦盡苦來)는 아니어야 하지 않는가?


돌아보니 내 인생은 단맛과 쓴맛이 뒤섞인 평탄한 오르막이었다. 자잘한 굴곡은 있었지만 크게 보면 평범하고 무난하게 시류를 따라 흘러왔다.

내가 자라던 시절에 비하면 국가도 국민도 엄청나게 잘 살고 있으니 나 또한 잘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지 잊어버리고 살았다.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시대,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공손한 시대, 백짓장도 맞들면 찢어지는 시대에

행복은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일까.


어린 시절 느티나무 아래에서 노래를 가르쳐주던 착한 이모가 돌연사한 아들을 위해 천도제를 지낸다고 알려왔다.

죽은 아들을 위해, 그리고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재앙을 막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이모에게 잔인한 고진고래는 없을 것이다.

외삼촌 말마따나 참 복도 없는 이모, 그 마음 씀씀이라면 내세에 넘치도록 많은 복락을 누릴 거라고 믿어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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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대왕암


팽팽해진 먹줄처럼 수평선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날이면 대왕암을 보러 간다.

해무 가득한 여름날의 대왕암도 운치 있지만 ‘시월의 어느 멋진 날’ 찾아가는 대왕암은 그대로 한 편의 시(詩)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제 몸을 내주며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변신한 바위들.

발그레 물든 그 바위틈에서 잊었던 이름처럼 피어오른 보랏빛 해국. 바람이 파도를 불러올 때마다 바다는 호국용의 전설을 일깨운다.

문무대왕 서거 후 왕비의 넋이 한 마리 호국용이 되어 동해에 잠겨들었다는 곳-

짙푸른 바다로 잠겨든 왕비의 넋이 해국으로 피어났을까, 대왕암 해국들은 어쩐지 더 짙고 강렬한 색깔이다.


오래전 눈앞에 두고도 건너갈 수 없었던 대왕암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바위 끝 초소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지만 출렁다리 아래 바다가 섬뜩하도록 깊어 더더욱 멀게 느껴졌다.

처녀시절 한때 울산에서 살다 고향으로 돌아갔고, 결혼 후 다시 돌아온 곳이 울산이다. 35년 전의 대왕암은 금단의 섬이었다.

그래서 더 가고 싶고, 보고 싶고, 밟고 싶었던 섬.

그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생긴 지도 오래건만, 나는 지금도 대왕암이 오래전의 그 섬처럼 두렵고 신비스럽다.


대왕암 꼭대기에서 굽어보는 바다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도록 짙푸르고, 으르렁대는 파도는 호국용의 기상처럼 드높다.

세찬 바람이 온 몸을 휘감으며 당장이라도 내동댕이칠 것 같아 바위를 붙잡고 난간에 의지해 일망무제의 바다를 바라본다.

해송 숲 아래로 아기자기한 해안선을 눈으로 따라가면 차르르 차르르 몽돌 구르는 소리,

그리고 파도가 거문고를 타는 섬 슬도. 또 그 너머엔 장생포, 온산.

 반대편 현대중공업과 함께 산업수도 울산의 동남쪽을 차지하는 조망이 바로 대왕암에 있다.


그 조망을 보러 하루 수백 명의 시민들이 대왕암공원을 찾는다. 외지 관광객들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보고 느끼고 가슴에 담아갈 대왕암이 오래도록 잊지 못할 이미지였으면 좋겠다.

일만오천 그루의 해송을 껴안고 바다를 향해 심호흡을 하고 있는 대왕암공원.

늙은 동백나무가 겨울부터 봄까지 꽃을 달고 있는 이곳은 여름 내내 해무가 드리워 사진가들의 셔터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공원 입구의 벚꽃 터널이 화려한 봄을 부르고, 보랏빛 해국이 가을 해안을 뒤덮는다.


대왕암을 만나러 오는 분들에게 가만히 당부하는 말은 너무 급한 마음으로 오시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

다급한 발걸음으로는 대왕암을 제대로 느낄 수 없으니 한 나절 쯤은 시간을 내서 와야 한다.

느릿느릿 해송 숲을 지나며 하늘을 찌른 소나무에게 나이도 물어보고, 울기등대의 내력도 들어보고,

해안 절벽의 바위 형상도 눈여겨보고, 마침내 수루방(수리바위)에서 일산진과 동구 전역을 굽어보아야 한다.

그 조망이 압권이라는 사실은 느리게 걸어본 사람만이 아니까.


가을 들머리, 내 마음은 벌써 대왕암에 가 있다.

그 유명한 대왕암 일출과 함께 왕비의 혼령 같은 보라색 해국이 해안을 뒤덮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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