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김이 사라졌다. 저녁나절, 마실 나가서 알았다.
그녀의 가게는 셔터가 내려진 채 ‘점포세’ 쪽지를 이마에 붙이고 있다.
점포세가 붙은 지는 두어 달,
그러나 그 쪽지는 유리문 안쪽에 조그맣게 붙어있어서 내심 안도했었다.
당장 가게를 그만두진 않겠지.
인수할 사람이 없으면 예전처럼 또 가게를 계속하겠지.
믿었던 내 발등에 그녀는 도끼를 던졌다.
미스 김. 그녀는 우리 동네 도서대여점 주인이었다.
구멍가게 주인도 접대용 호칭으로는 사장이라는데
미스 김에겐 도무지 그런 호칭이 어울리지 않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단정한 생머리로 언제나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이미지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나는 언제나 그녀의 나이를 10년 전으로 생각했다.
늦은 밤 주변 상가들이 모두 문을 닫고 들어간 시각,
그녀의 가게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
10여 평의 점포 4면을 꽉 채운 책들, 고객관리용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서
미스 김은 언제나 책을 읽고 있었다.
“이제 들어갈 때 안됐어요?”
그냥 지나치기 미안해서 동무나 해줄까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까지 책 반납할 아이가 2명 있어요. 그 애들은 늦어도 꼭 책을 갖고 오거든요.”
“가게 앞에 자동회수함이 있는데 뭘...”
“애들하고 얘기가 하고 싶어서요. 미연이가 며칠 전에 우울했거든요.”
미스 김은 중 3짜리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공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달래고
큰언니처럼 사근사근 말동무 되어주려고.
어떤 날은 밤늦도록, 어떤 날은 새벽까지 미스 김의 가게가 열려있었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아이, 책을 반납하러 왔다가 눌러 붙은 아이,
몇 시간째 서서 책을 고르고 있는 아이...
미스 김은 언제나 그들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다.
때로는 다정다감한 카운슬러로, 때로는 독후감을 함께 나누는 독자로.
미스 김이 그 많은 책들을 어떻게 다 읽고 소화했는지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하루에 새로 들어오는 책만 해도 20여권.
만화부터 환타지 소설, 무협지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가게에 들어오는 책들을 다 읽었다. 어디 그 뿐인가,
몇몇 고급 독자를 위해 순수문학 장르까지 섭렵하고
가게에 노벨문학상 전집까지 갖추어놓을 정도였다.
만화를 즐기는 손님에겐 만화 같은 얘기를,
환타지 소설을 찾는 손님에겐 환타스틱한 얘기를,
무협지를 빌리는 사람들에겐 무림고수 얘기를 할줄 알았다.
그녀는 가게에 오는 모든 손님에게 카운슬러였고 독서지도사였다.
대부분의 도서대여점이 만화가 주종이고
고작해야 환타지 소설이나 갖다 놓는 걸로 알고 있던 나에게 미스 김은 이외였다.
책 꽤나 읽었다고 자부하던 나도 그녀 앞에서는 백기를 들었다.
움베르토 에코부터 은희경의 소설까지 폭 넓은 독서에다
작중인물의 심리분석까지 곁들일 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책벌레거나 아니면 철저한 직업정신의 소유자였을까?
내가 도서대여점을 드나들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신간 서적을 일일이 다 사볼 수는 없고,
베스트셀러로 이름난 소설이라고 반드시 좋은 소설도 아닌 바에야
도서대여점을 이용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3박4일동안 책을 빌려 읽는 대가로 700원만 내면 되니까
책을 읽고 실망해도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날부터 책이 아닌 미스 김을 만나러
도서대여점을 드나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15도 각도로 머리가 약간 기울어진 그녀의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청산유수와 같은 달변을 듣고 싶었다.
그녀는 속독(速讀)일 뿐더러 속사포 같은 말솜씨를 갖고 있었다.
일사천리로 좌악 쏟아내는 그녀의 말은 논리에 맞고도 부드러웠다.
미스 김이 가게를 연 이후 우리 동네엔 도서대여점이 6개나 생겼다.
대부분 만화와 환타지소설이 주류를 이루는 소규모 점포였는데
어느 날부턴가 서서히 문을 닫기 시작했다. 과다한 경쟁에서 밀려나고,
인터넷에 밀려나고, 책 안 읽는 풍토로부터 밀려났기 때문이다.
1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미스 김이
‘점포세’를 써 붙이기 시작한 건 2~3년 전부터다.
이젠 가게가 지겨워서 그만두고 싶다고 미스김은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결혼적령기를 넘긴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며 아마 결혼하려나 보다 싶었다.
나는 한때 미스 김의 가게를 인수하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실컷 보면서 부업도 되고
무엇보다 가정 관리에 지장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시장조사를 통해 업계의 현실을 들여다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도서대여점은 사양길이었고 절벽 끝에 와 있었다.
소설보다 만화로 겨우 지탱하던 대여점은 인터넷 만화에 밀려
완전히 설 자리를 잃었다.
우리 동네에 그 많던 도서대여점이 지금은 딱 한 군데 살아남았다.
두어 번 점포세를 써 붙일 때마다 노처녀 히스테리 정도로 받아들였던 나는
세상 모든 도서대여점이 문을 닫아도
미스 김은 가게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10여년을 한결같이 그 자리에 밤늦도록 불 밝히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건물 주인을 통해 미스 김이 가게를 처분하고 고향으로 갔다는 얘길 들었다.
미스 김의 가게는 인테리어를 바꾸고 요즘 유행하는 이미지샵이 들어섰다.
책이 있던 풍경 대신에 화려한 이미지 사진과 장식품들이 요란하다.
낯선 가게 앞을 기웃거리며 나는 자꾸만 미스 김의 환영을 본다.
미스 김은 그 많던 책을 어디로 보냈을까?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던 어린 학생들을 어떻게 잊을까?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서 어떻게 살까?
아! 미스 김을 만나고 싶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영상 매체에 매혹되어도 저 혼자 책에 빠져있을 사람.
그리이스 신화부터 태백산맥에 이르기까지 막힘없이 좌르르 얘기할 사람.
누구에게나 눈높이를 맞추고 기꺼이 카운슬러가 되어주는 그런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