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 화들짝 핀 철쭉꽃을 보니 신라 여인 ‘미실’이 떠오른다.
꽃이 식물의 성기(性器)라는 걸 생각하면 저 농염한 자태와 선정적인 색깔이야말로
미실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꽃이다. 모든 시선을 붙들어매는 저 방창한 자태라니.
1,5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소설가 김별아를 통해 얼마전 ‘미실’을 만났다.
화랑세기(신라시대 화랑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기록)에 작가적 상상력이 보태져
쓰여진 ‘미실’을 읽으며 본능과 욕망, 여성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당대의 영웅호걸을 색으로 섬기면서 신라 왕실의 권력을 장악했던 미실.
대원신통(왕후나 후궁을 배출했던 모계혈통 중 하나로서 임금에게 색공(色供)을
바쳤던 계급)이라는 그녀의 신분을 통해 그 험난한 운명이 감지된다.
특이한 점은 우리 역사 속에서 많은 여자들이 한 남자를 위해 희생된 반면
미실의 경우는 한 여자에게 숱한 남자들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본능에 충실했고 자신이 부여받은 시대를 완벽하게 장악했던 여인.
‘얼굴만 이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여,
아름다움이 곧 힘이라고 믿는 미실을 통해 자신의 여성관을 점검해보기 바란다.
아담을 유혹해 선악과를 따먹게 한 이브처럼,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한 살로메처럼
미실은 신라의 팜므파탈(남성을 유혹해 파멸시키는 숙명의 여인)이었다.
이 책 속에는 근친상간이 많아서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윤리 규범이나 도덕적 잣대가 생기기 전의 상황이고, 혈통 보존을 위한
당위성과 신라의 개방적인 성 풍속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진골 정통과 대원신통 사이의 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미실은 자신의 사랑을 지킬 수 없었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세종과 헤어진 후 상처받은 그녀는 사다함과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권력의 힘은 그 사랑을 빼앗아 가버리고 그녀는 이후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권력의 힘을 키워 나간다.
그녀가 힘을 키워 나가는 방법은 물론 색공이다.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은 물론 동륜태자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인
사다함, 세종, 설화랑, 미생랑 등과 관계를 맺어 권력을 장악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권력자들과 동침해 그들을 손아귀에 넣었던 미실.
“마음껏 사랑하십시오. 후회없이 아끼고 돌보십시오.
사랑의 상대는 길을 따라 바뀌겠지만 순간의 진정만은 잊지 마십시오.“
라는 문장이 그녀의 사랑을 대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마음껏 사랑하기에 주저하지 않은 그녀에게 모든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문득 천지연폭포 앞에 새겨진 이생진 시인의 싯귀가 떠오른다.
‘실컷들 사랑하라 가슴이 있을 때. 죽은 뒤에도 네 사랑 간직할 가슴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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