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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당 옆, 마을의 중심이 되는 곳에 대청(大廳)이 있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조선중기 건축물로 질박하고 고졸한 멋이 풍긴다.
임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종 때(1632) 중창된 학사(學舍)로
나무의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 마음에 든다. 단청이 없어 더 아름답다.
대청마루 그늘에 누워 바람을 즐겼다. 오수에 잠긴 마을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2백호가 넘는 큰 마을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마을 안길에서 사람을 만날 수 없었던 한밤마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한창 농번기라는 것을. 부지깽이도 나와서 일을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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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름녘 우보강이 보이는 친구네 집에 깃들었다.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그녀는 내 다리를 걱정한다.
구들장에 뜨끈뜨끈 다리를 지지면 금방 나을 거라고 연기를 마시면서 웃는다.
처음 그녀가 아무 연고도 없는 시골로 들어왔을 때, 친정 언니가 찾아와서는
“엄마가 울고불고 난리 났다. 네가 타락을 해서 시골 들어갔다고 우시더라.”
7순의 노모 눈에는 혼자 시골로 들어간 딸이
세상에 환멸을 느껴 현실도피를 한 것으로 보였나 보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잣대로 남을 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용인하지 못한다.
제가 아는 것이 전부이고, 제 가치관이 가장 옳고, 제가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다.
나이 먹으면서 나도 비로소 깨닫는다.
내 생각이 반드시 옳은 건 아니라는 것을, 내가 틀릴 때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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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꿈을 위해 도회지생활을 청산했고, 자유를 누리면서 흙을 만지고 있다.
머지않아 그 흙은 도자기가 될 것이고, 막사발이 될 것이고, 화분이 될 것이다.
흙담 아래 뱀이 스르르 기어가고, 문틈으로 지네가 스며드는 촌집.
가마솥에 중탕으로 쪄낸 닭백숙에 두견주(杜鵑酒)를 곁들여 멋진 겸상을 차렸다.
무논에서 우는 개구리소리, 우보강이 흐르는 소리, 초여름 밤이 깊어가는 소리...
불빛을 보고 날아든 장수하늘소가 갓등에 부딪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에 놀랐다.
뒤집힌 채 버둥거리는 녀석을 날려 보내는 친구를 보며 내일은 집으로 가야지 생각한다.
뱀, 지네, 장수하늘소랑 같이 지내는 건 하룻밤으로 족하다.
아무래도 나는 그녀의 인생에 하룻밤 길손일 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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