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계절이 나를 통과하고 있구나.
숲 속으로 들어서자 왈칵 스며드는 젖은 낙엽 냄새.
저녁 약속도 있고 하니 백운산이나 가볍게 한바리하고 오자고 나선 걸음이었다.
지금쯤 다래가 한창이겠거니 하고 내심 점찍어둔 곳을 찾아나섰는데 아뿔싸, 다래넝쿨은 모조리 잘려나가고 없다.
발 밑에는 도토리가 쏟아부은 것처럼 널려있는데 그냥 두고 발걸음이 떨어져야 말이지.
이제 그만, 이제 그만, 하면서도 배낭에 가득 차도록 도토리를 주웠다.
애초 등산로를 벗어나 들머리를 잡은 것이
내친 걸음인지라 그 길로 계속 방향만 잡고 올랐는데 길 없는 길에 그야말로 빨치산루트를 타고 말았다.
끝없는 잡목 숲에 간벌로 쓰러진 나무들, 울울창창한 숲이 하늘을 가리더니 비까지 후두둑 떨어진다.
운무가 산을 내려오며 시야를 가리는데도 우리는 눈 앞의 더덕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비와 땀에 흠뻑 젖어 주능선을 찾았을 때는 출발 시간에서 거의 4시간이 흘러 있었다.
가지-운문 주능선 우뚝한 조망바위에서 한숨을 돌린다.
일행들이 믿음직했기 망정이지, 초보들 데리고 왔으면 어쩔 뻔했나. 조금은 긴장되고 불안한 산행이었다.
백운산 정상 부근은 제법 단풍이 곱다.
높다고 단풍이 먼저 드는 것도 아니고, 낮다고 반드시 단풍이 늦게 드는 것도 아닌가보다.
나이 먹으면 다 철드는 것 같아도, 천만에! 평생 철 안드는 나같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玉을 주고 돌을 돌려받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네.
내 눈에 눈물 흐르게 하는 사람 더 이상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네.
내 말을 의심없이 믿어주고 내 어깨를 토닥여주고, 내 입가에 웃음을 선사하는 친구들이여.
언제나 내편이라 고맙다. 고맙다.
베틀바위 근처에도 단풍이 울긋, 저 멀리 가지산 주능선에도 단풍이 불긋.
가을아, 어디쯤 왔니. 물을 새도 없이 성큼 다가온 계절을 실감한다.
구룡폭포에 살던 용이 승천을 해버렸는지 폭포에는 물이 바싹 말랐다.
길눈 어둡기로는 나하고 비슷한줄 알았는데 그래도 당신이 나보다 훨 낫네.
영악한 남자도 못되고, 용의주도한 남자도 못되는 참 바보같은 당신. 그러니 나를 만나 살지.
영하 십몇도의 겨울산에서 내 발에 아이젠을 채워주었던 친구, 그때 네 손은 얼마나 시려웠니?
언제라도 부르면 함께 산에 갈수 있는 친구, 너도 고맙다.
탁족하는 시간만큼 상쾌한 순간이 또 있을까.
내 다리에 알통이 굵거나 말거나, 내 발이 못생기거나 말거나 아무 거리낌없이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 고맙다.
한실마을 느티나무집. 토요일 저녁 하룻밤을 지새운...
핼쓲한 메밀꽃, 너도 나처럼 철 없이 피었구나.
저 한 송이 꽃을 담기 위해 젖은 땅에 털썩 주저앉길 몇 번.
차나무 꽃이 가을에 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늘 보면서도 잊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피고 지는 꽃이 어디 저 꽃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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