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정녕 꿈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간밤에 도둑처럼 살짝 내린 눈이 3월 첫 아침을 새하얗게 덮어버렸으니.
경주 덕동호를 따라 왕산마을까지 아슬아슬하게 굴러가는 차 안에서
내심 설레고 불안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날에 함박눈이 내려서 경이로웠고,
미끄러운 눈길을 따라가자니 덕동호에 수장될까 불안했다.
세상 모든 소리는 눈 속에 빨려들어 가고 그날 덕동호는 태초의 아침처럼 고요했다.
스톱모션으로 정지된 화면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덕동호의 설경.
잠시 차에서 내려 봄눈 속을 걸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황룡사 마을 그 깊고 깊은 골짜기에 차를 세우고 한티버든으로 오르는 길,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씨는 한겨울을 연상케 한다.
눈은 그쳐있었지만 바람이 휘몰아쳐 쌓인 눈들이 마구 퍼부어 내린다.
‘춘설이 분분’하다기엔 너무 많은 양이다. 너무 매운 바람이다.
벚꽃이 바람에 지듯 눈보라가 날리는 산길.
잔뜩 물 오른 오리나무도 새파랗게 질리고,
사춘기 소녀의 젖가슴처럼 봉긋하게 부푼 진달래 꽃봉오리도 숨어버렸다.
한티버든 지나 된비알 하나를 잡아 오르는데 오늘 일진이 심상찮다는 느낌.
원래 계획은 황룡사 서쪽으로 올라 동대봉산 능선을 타고 함월산까지 가서
도통골로 하산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순간 우리는 눈보라 속에서 시야를 잃었고 방향감각을 놓쳤다.
전에 이 길을 몇 번이나 왔다던 세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다르다.
눈보라 속에 우두커니 섰다가, 지도를 펴놓고 나침판을 보다가 마침내 찾은 길.
그 끝에는 ‘함월산 570m’라는 아크릴 명판이 붙어있다.
서북쪽으로 오리온 목장의 초지가 건너다보인다. 하얀 슬로프가 멋지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함월산 명판 아래 ‘뒤를 보세요’란 글이 있다.
아크릴 명판을 뒤집으니 ‘여기는 함월산 왕시루봉. 정상은 동북쪽 00m’
참 헷갈린다. 대체 누가 옳은 거야?
눈보라치는 산정에 서서 지도를 펴놓고 또 입씨름한다. 함월산이 맞니 틀리니...
나는 함월산이 어디라도 상관없다. 오늘 얼어죽지 않고 하산하면 다행이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처 걸으니 내리쏟는 비탈길, 그리고 그 끝에는 널따란 골짜기.
“에헤! 여기가 도통골이네. 우리가 도통골로 바로 내려와버렸네...”
비로소 독도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의 그 허망함이란.
천신만고를 예상했던 산행에서 너무나 싱겁게 실크로드를 발견했으니 그 허탈함이란.
도통골을 빠져나올 무렵 그 많던 눈들이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졌다.
불과 3~4시간 전의 설국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황량한 초봄의 풍경이 펼쳐진다.
매화나무가 발그레 꽃순을 틔우며 우리를 반긴다.
밭두렁엔 부지런한 잡초들이 다투어 고개를 내민다.
오늘 아침 그 눈보라는 정녕 꿈이었던가?
내가 헛것을 보았던가? 온 천지가 눈으로 덮였던 그 풍경은 환상이었나?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고, 남가일몽을 떠올리고, 마침내 일장춘몽을 깨닫는다.
그렇지. 우리네 인생이 그처럼 잠시라는 거겠지.
사랑도 미움도 아름다움도 잠시라는 거겠지. 마음 한번 돌리면 극락이 게 있는걸.
도통골 끝에는 그 유명한 기림사가 깃들어있다.
경주 사람들이 ‘지림사’로 부르는 그 절은 그 옛날 불국사보다 규모가 컸다.
불국사는 박정희 정권의 작품으로 그 옛날엔 기림사의 말사에 지나지 않았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는 게 세상 이치인가.
권력자의 은총을 입은 불국사는 화려하게 발전했고
기림사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꼴이다.
드문드문 휴일 나들이객이 찾아오는 기림사 앞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인다.
겨울에서 봄까지 단 세시간.
오늘 우리는 세 시간만에 두 계절을 통과했으니 그 기념으로 건배.
아침에 쌓인 눈이 흔적없이 사라짐으로 일장춘몽을 깨달았으니 그 깨달음에 다시 건배.
추령고개를 넘으면 혹시 아침에 내린 눈이 남아있지 않을까.
다급한 마음으로 고개를 넘었으나 봄눈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없다.
건조한 대기에 삽시간에 스며든 봄눈은 머지않아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겠지.
나도 누군가에게 봄눈이 되고 싶다. 그에게 스며들어 잎과 꽃을 피우리라.
내 몸은 삽시간에 녹아 사라져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면
기꺼이 봄눈처럼 그대에게 가리라.
<함께 산행해준 경주의 민사장님 내외분, 한돌님, 산들뫼 님께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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