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동안 집에 와 있던 아들이 제 집으로 가고

덩그렇게 남은 녀석의 방을 내가 차지했다.

그동안 북향 방을 확장해 서재로 썼는데 지난겨울 너무 추워서

호시탐탐 녀석이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봄에 녀석이 집을 떠나자마자 컴퓨터를 아들 방에 옮겼는데

이번엔 글쓰기 자료들이며 내 사물함까지 다 옮겨버렸다.

결혼 후 지금까지 화장대 없이 살지만 책상 하나만은 내 것을 고집하며 살았다.

신혼시절 단칸방에 살 때도 앉은뱅이책상이 있었고

처음 마련한 10평짜리 아파트에도 내 책상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혼자 있는 공간을 원했다.

가족 공동의 공간이 아닌 나 혼자만의 공간.

한 남자의 아내이고 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보다 나라는 인격체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리 호락호락한가.

1가구2주택을 차지하고 살기엔 경제적인 것보다 타인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내가 무슨 대단한 작가라고 집필실 운운하며 집을 한 채 차지한단 말인가.


나는 한때 독립공간에 대한 집착으로 법원 경매까지 기웃거리기도 했다.

정자 바닷가의 15평짜리 오피스텔이 IMF사태에 부도가 나서 3차까지 유찰된 게 있었다.

직사각형의 반듯한 원룸 창밖으로는 일망무제의 바다가 펼쳐져 있는 집!

당시 분양가가 시내 중대형 아파트 한 채 값이었고,

울산 시내 몇몇 재력가들이 분양받아 여름 한철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피스텔 미분양 물량이 고스란히 경매로 넘어간 것이었는데

분양가의 3분의 1가격에 오피스텔을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과시용 별장도 아닌, 재태크도 아닌, 나의 집필실을 3분의 1가격에 사고 싶었다.


경매정보지를 구해서 읽어보고, 권리분석도 의뢰하고, 현장도 몇 번이나 둘러봤다.

8층짜리 건물에 2층은 해수탕, 3층부터 7층까지 15평형 오피스텔 80여 채가 있었는데

3,4층은 지난 경매 때 나가버리고 5층 이상만 몇 개 남아있었다.

아침마다 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는 방! 혼자 여기 와서 글 쓰면 얼마나 좋을까!

참 꿈도 야무지고 포부도 대단했다. 왜 나는 그 나이까지 철이 들지 않았을까?


4차 경매를 며칠 앞두고 바닷가 그 오피스텔을 다시 찾아갔다.

낮에만 보고는 모른다며 일부러 밤에 보러 갔다.

캄캄한 밤, 전기가 끊어진 오피스텔 내부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공동전기가 끊겨 엘리베이터며 복도전등도 들어오지 않아 계단을 더듬어 올라갔다.

긴장해서 그런지 5층까지 올라가는데도 숨이 벅찬데다가

ㄷ자로 뻗어있는 복도 저쪽에서 뭔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간이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봐야지.

딩동, 며칠 후 경매에 넘겨질 그 집의 벨을 눌렀다. 아무 대답도 없다.

쾅쾅, 문을 두들겼다. 세 번, 네 번, 나중엔 발로 찼다.

 

“누구슈?”

현상수배 몽타즈 같은 남자가 험상궂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나는 한 눈에 그가 범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뺀질뺀질 닳아빠진 파렴치한 얼굴.

“죄송합니다. 경매 때문에 집 좀 보려구요. 주인 되세요?”

“아, 씨팔~ 오늘 몇 번째야 이거?”

속으로 뜨끔, 기가 죽는다.

나는 문을 여는 순간 벌써 그의 눈빛에 기선을 제압당한 상태였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나 oo일보 국장까지 지냈던 사람이야.”

로부터 시작된 그 남자의 말을 들어보니 한때 이 도시의 언론계를 주름잡던 사람이

어쩌다 건물주와 이해관계가 얽혀서 이 오피스텔에 임시로 살고 있다는 거였다.

“이 집을 낙찰받게 되면 건물주에 대한 내 채권도 책임져야해.

안 그러면 나는 집을 비워줄 수가 없지. 안그래?“

사실이 그렇지 않다 해도 나는 그 집에 대한 욕심이 깨끗이 사라졌다.


아침마다 동해의 일출을 보고, 일망무제의 바다도 보고, 다 좋지.

하지만 밤마다 공동묘지 같은 이 복도를 어떻게 지나 다녀?

그 남자의 공갈 협박성 말에 주눅 들고, 주변 환경에도 실망해서

나는 그 오피스텔을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날 이후 ‘나만의 공간’은 영원히 사라졌다. 내 복에 무슨...


아들을 보내고 내 차지가 된 방에서 나는 혼자 행복하다.

이 방에서 일출을 보고, 야경을 보고, 글을 쓰고, 책을 읽을 것이다.

아들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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