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 한 빛나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 한 빛나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인디언들은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으로 일 년 열두 달에 이름을 붙였는데

11월의 이름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한다. 한 줄의 멋진 서정시다.

11월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깊은 상념에 빠진다.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을 생각한다.

나이 들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내 생각이 반드시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번번이 나는 대인관계에서 상처를 받는다.

내 방식대로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고, 내 생각을 그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본 영화 ‘리빙 라스베가스’를 생각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술을 다 먹고 죽어버리기 위해 라스베가스로 온 남자와

악덕포주의 손에서 하루도 벗어날 수 없는 창녀.

화려한 도심의 뒷골목을 아프게 후벼 파는 이들의 사랑은 내 가슴에 뜨거운 지문을 남겼다.

알콜로 죽어가는 남자에게 여자는 몸을 판 돈으로 휴대용 술병을 선물한다.

죽어가는 남자에게 최고의 선물을. 자신이 원하는 선물이 아닌 상대방이 원하는 선물을.

격렬한 발작 끝에 여자의 품에서 죽어간 그 남자를 추억하며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그 사람의 아픔 그대로를 사랑했다는 뜻이다.

그가 알콜중독자가 아니기를, 반듯하기를, 건강하기를 요구한 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했다는 뜻이다.

 

 

인간관계에서 마찰은 항상 내 방식대로 상대방을 길들이려는 데서 일어난다.

부부싸움이 그렇고 깨어진 우정이 그렇고 미묘한 가족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도 남편과 20여년을 다투며 살았다. 한 두 번은 이혼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는 나를 길들이려 했고, 나는 그를 길들이려 했다. 우리는 사랑하는데 너무 서툴렀다.

지천명을 넘어서야 우리는 서로 다투지 않게 되었다.

서로 정서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 측은해서 양보하고 배려하는 사이, 상대방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사이.

그러나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맞기까지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한때 에릭 시걸의 소설 ‘닥터스’에 나오는 두 사람의 우정과 사랑을 동경했었다.

여주인공은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어떤 남자와 잤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만약에 임신이 되면 함께 가서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해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그 정도로 신뢰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우정을 사랑으로 아름답게 발전시킨다.

상대방의 결함을 알면서도 기꺼이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랑.

필요에 의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저마다 크고 작은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판도라 상자에 남은 마지막 단어 ‘희망’인지도 모른다.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

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


내 마음도 다 비었다.

누가 또 올 것이냐.


저녁 하늘 산머리

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그리운 사람아

내 빈 마음 들 끝으로


그대 새가 되어

언제 날아올 것이냐.

             <이성선 ‘입동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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