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옛길을 걷고 싶었다. 아니, 오래전부터 걸어왔었다.

예전에는 등산 중에 우연히 만났고, 요즘은 일부러 찾아가는 게 다를 뿐.

죽령, 문경새재, 고치령, 꽃꺾기재... 거기 남아있는 옛길의 흔적을 밟고 싶었다.

자동차로 다니는 길이 아닌, 임도로 밀어버린 길이 아닌, 옛날 옛적 다니던 길.

그러나 세월이 얼만데 그 길이 그대로 남아있겠나.

산허리를 자르고 굴을 뚫는데 사람들은 길이 좋아졌다는 찬사를 보내지만

나에겐 언제나 옛길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빠르고 편리하게 가기 위해 세상의 모든 길은 최대한으로 단축되고 포장되지만

정작 내가 걷고 싶은 길은 흙냄새 물씬한 조붓한 산길이다.

  


지난겨울 대관령옛길을 밟으러 나섰다가 눈에 막혀 돌아섰는데,

한 해가 저물 무렵 그 길 위에 다시 섰다. 눈 대신 낙엽이 켜켜이 쌓인 그 길에.

겨울잠에 든 고요한 숲과 가만히 숨죽여 흐르는 물, 시리도록 차고 맑은 하늘.

무릉계곡의 웅장함보다 천불동의 화려함보다 눈 맛이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물에 떠내려온 낙엽이 호수를 이루고, 징검다리 둘레에도 낙엽이 모여 쉬고 있다.

제왕산(841m)까지 2시간여, 나는 날렵한 여우처럼 가볍게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고 가벼운 몸으로 겨울여행을 떠난 것일까.

새소리도 떠나간 초겨울 숲에는 바람과 햇살이 어울려 놀고 있다.

조망이 트이는 능선에 이르자 저 멀리 대관령 목장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선자령 넘어 대관령 목초지대를 지나고 황병산 넘어 오대산까지,

내 눈은 그리운 이의 이목구비를 만지듯 마루금을 더듬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몸을 가누기 힘든데도 나는 산정에 오래오래 서 있었다.

옛 영동고속도로와 새로 생긴 고속도로가 정맥처럼 드러나 있는 대관령.

드넓은 초원에 우뚝 선 풍력발전기가 하얀 팔랑개비처럼 이채롭다.

 


제왕산에서 대관령까지는 백두대간길, 수많은 산꾼들이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밋밋한 임도를 걸어 대관령 옛 휴게소를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언제였더라, 버려진 저 휴게소 처마 밑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잤던 때가.

칠흙같은 밤, 간간이 지나는 화물차 소리에 잠을 설치며 몸을 뒤척였는데.

그 옛날 강릉의 해산물을 지고 대관령을 넘어 평창으로 가던 도부장수의 혼이

내게 씐 건 아닐까. 언제나 길 위에 있는 그 고단한 팔자라니.

대관령휴게소에서 아스팔트를 걸어 내려와 반정에서 진짜 옛길을 만났다.

횡계까지 절반쯤 왔다는 뜻의 반정이라는 지명도 대굴령의 어원처럼 재미있다.

낙엽이 수북수북 쌓인 S라인 길을 내가 걸어왔는지 떠내려 왔는지 기억에 없다.

산길을 걷다 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다. 한순간 무중력상태로 시공을 초월할 때가.

번쩍 정신이 들어 살펴보면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는지 날아왔는지 모를 때가.

군데군데 신사임당을 기리는 안내판이 없었더라면 나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대관령 근처에 올 때마다, 생각나는 인물이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다.

재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남편을 만나 불행한 삶을 살았던 두 여인.

한 사람은 자식이라도 건졌지만, 한 사람은 철저히 불행하게 살다가 비명에 갔다.

주색잡기에 빠져 학문에 뜻이 없던 남편을 죽기 전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사임당.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무덤에 풀이 마르기도 전에 내연의 처와 재혼해 버렸다.

온갖 패악을 부리는 계모를 피해 이율곡은 한때 출가를 할 정도였는데

그 남자는 잘난 아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타고난 한량이었을까.

신사임당에 비하면 허난설헌은 철저히 불행했던 여인이었다.

풍류를 즐기는 남편과 학대를 일삼는 시어머니 밑에서 두 아이를 잃고 27살에 요절이라니.

그녀의 평생 한은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었다고 한다.

 

 


비단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뿐이랴.

재능이 뛰어난 여자들이 남편을 잘못 만나 일생을 고독하게 사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프다.

아내의 재능을 인정하고 기를 살려주기보다 힘으로 제압하려고 드는 남자들,

끝없는 여성편력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고 폭행을 일삼는 남자들...

미운 아비의 자식이지만 끝까지 거두고 책임지느라 자신의 삶은 누더기가 되어버린 여인들.

자신의 불행한 삶을 끌어안고 속울음 우는 현대판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얼마나 많을지.

대관령 옛길에는 군데군데 낙엽의 늪이 고여 있고, 저절로 생긴 낙엽 슬로프도 있다.

낙엽의 늪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보다가 슬로프를 따라 낙엽스키를 타고 내려왔다.

아름드리 소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하늘을 찌르는 낙엽송 길을 물 위의 낙엽처럼 떠가며

세상 모든 것이 다만 흘러갈 뿐이라는 쓸쓸한 자각을 느꼈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 곁에 머무는 모든 것은 잠시 명멸하는 존재일 뿐.

가을을 보내기도 전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처럼 나도 늦기 전에 보내야 할 건 보내야겠다.

부질없는 욕망도, 덧없는 그리움도, 아픈 상처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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