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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첫사랑, 첫차... 모든 처음은 설레고 아름답다.

40년지기와 지리산길에 나섰던 그날은 첫추위가 자객처럼 스며든 날이었다.

친구는 가족들의 열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새벽길을 나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첫추위에 놀랐는지 차를 잘못 타서 안의에 내린 그녀 덕분에 한적한 동네를 망연히 거닐었다. 안의에서 함양을 거쳐 인월로 가는 길, 바람이 연무를 쓸고가버려 하늘은 더없이 청명하다.

‘그냥, 걷고 싶어서,,, 늘상 허둥거리는 내가 안쓰러워서...’

라고 그녀는 지리산길을 제안했었다.

서울살이 8년, 절반의 성공은 이루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언제나 지리산 자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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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길은 지리산 둘레 3개도(전남.전북.경남) 5개시군(구례.남원.하동.산청.함양)

16개읍면 80여개 마을을 이어주는 300여km의 길이다.

작년부터 옛길 복원과 정비를 시작해 올해 첫구간 20여km의 길이 열렸는데,

친구는 나에게 그 길을 함께 걸어보자는 것이었다. 느릿느릿 아무 생각 없이.

지리산길 안내소에 들렀을 때가 마침 점심시간이라 우리는 지도 한 장 들고 길을 나섰다. 마을 지형이 매화를 닮았다는 매동마을에서 상황마을 다랑논을 지나 등구재에 이르기까지 더러는 농로를, 더러는 임도를, 또 더러는 논둑 밭둑 마을길도 지났다.

남원(인월)과 함양(마천)을 이어주는 이 길에는 산자락에 깃든 마을이, 고사리밭이, 다랑논이 정겹다.

빨갛게 익은 홍시와 집집마다 말리는 곶감이 초겨울 풍경에 악센트를 찍는다.

군데군데 마을 특산물을 갖다놓은 무인판매소에 삐뚤빼뚤 쓴 할머니들 글씨가 정겹다.


                                           <등구재 넘어 창원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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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송사 가는 길>

거북이 등을 닮았다는 등구재를 지나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날리는 것이 낙엽인지 눈인지,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한순간 눈을 뜰 수가 없다.

짧은 머리카락을 숲길에 노랗게 떨구고 하늘로 쭉쭉 뻗어있는 낙엽송길.

그 옛날 누군가는 인월장 보러 이 고개를 넘었을 게고, 또 누군가는 시집을 갔겠지.

창원마을까지 호젓한 숲길을 걷는데 눈발이 굵은 비듬처럼 흩날린다.

지리산 연봉들은 운무에 가린지 오래고 주위가 어둑해지며 날씨는 더욱 칼칼해졌다.

오늘 서쪽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데... 친구의 핸드폰이 연달아 울린다.

“엄마, 괜찮은 거예요? 춥지 않아요?” “당신 괜찮아? 내가 가지 말랬더니...”

30분 이상 걸어본지 오래됐다는 친구는 아마도 요조숙녀에다 왕비인 게다. 
 
                                                                   <멀리 눈구름이 몰려온다. 금계마을 직전>
 

금계마을 민박집에 들어선 시간이 오후 5시반. 오늘 4시간 걸은 셈이다.

번듯한 간판을 내건 민박집을 두고 우리는 군불 때주는 촌집을 찾아 들어갔다.

무말랭이 말리던 방을 대충 쓸어내고 할머니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다.

매캐한 연기가 문틈으로 스며드는 방, 따끈한 아랫목에 몸을 지지면서 여독을 푼다.

40대에 홀로 되었다는 말밭댁 할머니는 다섯명의 자녀를 어떻게 키웠을까.

평생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을텐데 허리도 굽지 않고 몸도 재바른 게 신기하다.

산간 오지라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마을에 지리산길이 열리면서 전국 곳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머니는 좋아라 하신다.

산골에 홀로 살다가 고독사(孤獨死)하는 노인들도 있는데,

산길이 열리면서 물류와 인심이 함께 열리면 얼마나 좋을까.

투박한 시락국과 할머니표 갈치조림으로 호텔의 요리보다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밤이 깊자 작심한 듯 눈이 퍼부었고,

어느 집에선가 우~워! 늦도록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시랑 고시랑 얘기를 나누던 친구는 어느새 잠이 들고
나는 어둠 속에서 문득 오늘 차에서 받은 한 통의 전화를 떠올렸다.

“윤숙씨 조칸데요... 흑흑... 이모가...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어요...”

어려운 시절 B형간염을 치료 못한 것이 간암으로 발전해 기어코 저 세상으로 가버린 친구. 두세달 전에 통화할 때만 해도 차를 볼보로 바꿨다고 자랑하던 그녀였는데...

꺼지기 전의 촛불이 잠시 밝은 것처럼 그녀의 명랑함은 죽음을 앞둔 세레모니였을까.

1년에 절반은 병원에 입원했던 그녀는 지난 몇 년동안 상위 10%의 삶을 누렸다.

질량불변의 법칙이 사람의 일생에도 적용되는 거라면 그녀는 한때 가난했기에

말년이 행복했던 것이고, 오늘 드디어 제 몫으로 받은 복을 다 써버린 모양이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던 그 간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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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만석군의 집이었다는 폐가... 금계마을>

엎치락뒤치락 밤을 보내고 새날을 맞았다. 밤새 눈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그쳤다.

수도가 얼어붙어 할머니가 따뜻한 물을 세숫대야에 퍼다 주신다. 늙은 어머니같다.

말밭댁 옆집에 한때 만석꾼이었다는 폐가가 있는데 마루 위에는 무청이, 흙벽에는 곶감이 잔뜩 걸려있다. 옛날 기와를 그대로 이고 금방 무너져 내릴 듯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집. 친구는 그 집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런 집에 살고 싶어, 저런 집에...

날씨도 춥거니와 아침에 코피가 났다는 친구를 데리고 세동까지 4시간을 또 걷겠나?

일단 벽송사까지만 걷자고 길을 나섰는데 아침 공기가 여간 차지 않다.

벽송사 가는 길은 참으로 호젓하고 아름다웠다. 마을

사람들이 절에 기도하러 가던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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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암정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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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암정사에서 바라본 지리산 연봉>

지리산의 하늘공원으로 묘사되는 서암정사는 묵언수행 중인 스님 같다.

멀리 천왕봉을 향해 깊고 깊은 칠선계곡을 굽어보며 고요 속에 침잠해 있는 절.

불교의 화엄세계를 상징하는 갖가지 마애불들이 도량 이곳저곳에 서 있고

극락전 석굴법당에는 여러 불상과 신장단 등이 불경을 재현하고 있다.

체력저하로 서암정사를 포기한 친구를 중간에서 만나 벽송사 가는 길을 오른다.

가파른 시멘트길 20여분 끝에 나타난 벽송사는 겨울잠에 깊이 빠져있었다.

동안거에 든 스님들을 방해하지 말라는 안내판에 발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걸었다.

현판을 제외하고 모든 건물이 리모델링된 듯한 벽송사는 한국 선맥을 이어온 8분의 조사가  수도 정진한 도량으로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도 있는 절이다. 법당 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도인송과 미인송이 군계일학처럼 눈에 번쩍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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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선계곡 입구 추성마을, 국화차용 국화를 재배하고 있다.>


                <도인송, 미인송을 배경으로 동안거에 든 벽송사>

컨디션 난조를 보이던 친구가 안경을 잃어버려서 온 길을 되짚어갔지만 찾지 못했다.

난감한 심정으로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건너편 추성마을의 다랑논들이 유난히 노랗다.

칠선계곡 입구인 추성마을에 가서야 그 노란색들의 정체가 국화라는 걸 알았다.

국화차 재배지에서 택시를 불러 오도재를 넘어 함양으로 가기로 했다.

옛날에는 지리산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 온 남해 하동등지의 해산물이 오도재를 지나

전라도나 충청도로 운송되었다고 한다.

정상에 지리산 제1문이 우뚝 서 있는 오도재는 변강쇠전의 지리적 배경이기도 하다.

변강쇠와 옹녀가 전국을 떠돌다 발걸음을 멈춘 곳, 그만큼 살기 좋은 땅이라는 뜻이다.

지리산 조망공원에서 차를 멈추고 광대한 지리산을 바라본다.

올라오면서 잠시 반야봉을 본 것 같았는데 주능선은 운무 속에 완전히 잠겨있다.

어느 봄날 중산리에서 천왕봉 찍고 성삼재까지 17시간 종주도 했었고,

천왕봉 근처에서 비박하고 비를 맞으며 칠선계곡으로 8시간 이상 걷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산행이 나를 설레게 하진 않을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일이다. 순리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일이다.



                                                      <칠선계곡 하류>

함양 상림의 늦가을을 걸으며 친구는 어린시절을 얘기한다.

그녀의 외가는 함양, 시댁은 거창. 50여년을 심리적으로 그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곳에 그녀는 다시 돌아오고 싶어한다.

한때 ‘시골로 가서 살아야지’가 아니라 ‘서울을 탈출해야지’가 목적이었다는 그녀가

언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올지는 모르겠다.

이런저런 인연들에 얽혀서, 빛 좋은 개살구같은 서울 생활을 쉽게 떠날 수는 없으리라.

40년지기 넷 중에 어제 또 한명을 보냈으니 나는 이제 묵은 친구가 별로 없다.

숙아, 너라도 오래 살아남아서 가끔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지리산길을 걸어보자꾸나.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너와 나로 만나

지리산길 300km를 두고두고 걸어보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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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을 소복하게 둘러쓴 지리산 봉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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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성마을 국화재배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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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조망대에서 본 천왕봉 일대가 눈구름에 싸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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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재 넘어 함양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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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상림, 늦가을 낙엽이 기와지붕을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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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짚으로 새 지붕을 얹고 있는 연자방앗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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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건너온 사랑의 언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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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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