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上)은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이고, 무주(無住)란 머무름도 없는 자리라는 뜻이지요.

중생은 재앙의 자리인 부귀영화에 머물려고 하고, 스님은 머물 곳도 없는 법(眞理)의 자리에 머물려고 한다는 데 차이가 있지요."

<정찬주 '암자로 가는 길' 중에서 지리산 上無住庵 스님 말씀>

 

 

'내가 세상에 와서 뭐 하나 제대로 해놓고 가는 일이 있겠나...' 실상사 뜰을 거닐면서 문득 그런 자책이 일어났다.

두 아이를 데리고 부처님 전에 엎드려 절을 올리는 여인을 보면서 생긴 자책이다.

아들에게 반듯한 가르침도 주지 못하고, 남편에게 알뜰한 사랑도 쏟지 못한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럽다.

한번 다녀가는 이 세상을 왜 이렇게밖에 못사는 건지. 끊임없이 서로를 외롭게 하고, 초라하게 하고 아프게해야 하는지.

'왜 멀리 떠나와도 변하는 게 없는 걸까, 인생이란' - 김영하의 말처럼 실상사까지 와서도 나는 침울하다.

정신 차리고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해 떨어지고 어두울텐데, 나는 아직도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가족산행이 무산되고 두어군데 전화를 넣었는데 흔쾌히 수락해준 산친구 등자. 두시간도 못돼 배낭을 챙겨 내 차에 동승했다.

신년 벽두, 갑자기 산에 가자는 제의에 선뜻 동의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더군다나 산행 경력이 만만찮은 마니아가.

산이 뭔지 제대로 모를 때 그녀를 만나 지리산 종주도 함께 했고 한겨울 덕유산 종주를 비롯해 소백 치악 설악 등 수많은 산들을 다녔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우리에게 늘상 꽃피고 새우는 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서로의 개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몇 번의  비바람을 맞았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다가 이즈음 다시 만났다.

1대간9정맥 완주를 눈앞에 두고있는 그녀에게 7암자 길은 피크닉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누구보다 듬직하고 사랑스럽다.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 조망공원에 섰으나 역광의 지리산 연봉은 어둡기만 하다.  사진은 지리산 자연휴양림 일부.

근처에 뱀사골, 한신, 백무동계곡이 있어 여름엔 피서객들이 많을듯. 한겨울 고즈녁한 산속에서 묵어가는 건 더 좋은 일일테고...

 

 

등자표 먹거리를 민박집 방바닥에 쏟아놓는다. 묵은 김치, 누룽지, 쌀, 돼지고기, 초코파이, 마늘지, 멸치, 감자라면, 복분자술, 커피...

돼지고기 수육 안주에 복분자 술 두어잔으로 불콰해진 얼굴, 나의 도반은 말했다.

"어떤 년들은 연애도 잘도 하는디 우리는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안그냐? 남의 인생 뭐라고 할거 엄써. 다, 지 쪼대로 살믄 되는겨."

순천 사투리로 술술 풀려나오는 그녀의 입담은 당할 사람이 없다. 억세고 당차 보이지만 마음 한구석은 보드랍고 여리기 짝이 없는 여자.

장거리로 멋진 산행을 하고 오면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한시간씩 수다를 떨곤 한다. 넘치는 감동을 누구에겐가 전하고 싶어서.

이쁜 것 좋은 것 혼자 알고 간직하는 사람이 있나하면 등자처럼 누구에게 주고싶어 안달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기꺼이 그녀 편이다.

 

 

약수암 들머리를 찾아 임도 알바 10여분, 되돌아와 다시 들어선 갈림길에서 벌통 연립주택(?)을 만났다.

지리산 7암자 지도만 한장 들고 나선 길,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부실한 게 이외로 많다는 걸 실감한다.

사진 위주의 정보가 대부분이다 보니 정확한 거리나 소요시간도 들쭉날쭉하고, 들머리 시그널도 드물다.

연이틀 계속되던 맹추위가 아침에 약간 누그러진듯 하였지만 지리산 북쪽 자락이라 역시 공기는 얼음처럼 차갑다.

완전무장으로 산행을 시작했으나 20분도 안돼서 겉옷을 하나씩 벗는다. 복면도 벗고, 겉장갑도 벗고, 티셔츠 바람으로 올라간다.

사랑이 진실하면 저절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입었던 모든 격식을 하나씩 벗는다. 모두들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해 사랑에 실패한다.

 

 

45리터 배낭이 빵빵하도록 짐을 지고 나의 도반은 눈길을 앞서간다. 영하 15도의 소백산에서 내 신발에 아이젠을 신겨주던 친구.

오늘은 내 다리를 걱정하며 짐이란 짐은 저 혼자 다 지고 간다. 내게 남은 건 카메라와 한 병의 물.

실상사에서 약수암까지 1시간. 지도상에는 여기서 삼정산 능선이 시작되는데, 순간적으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능선길로 붙어볼까 싶었다.

그러나 약수암 옆길로 치고 올라가다가 길을 놓쳐 또 알바, 마음을 고쳐먹고 삼불사 가는 길로 돌아왔다. 햇살은 우리 몫이 아니었나보다.

약수암은 폭격 맞은 것처럼 어수선해서 눈길 둘 데가 없다. 중창불사 중이라 건축 자재들이 절 마당에 어지러이 널려 있다.

 

 

 삼불사 가는 길이 어쩌면 그리도 멀고 험한지. 도마마을을 지날 때 잠시 햇살을 보곤 2시간 가까이 응달이 계속된다.

한평생 이 마을에서 살았다는 노파와 잠시 길동무가 되었는데 '소속이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날씨가 풀려서 산에 나무하러 간다는 노파는 자신이 복이 없어 이렇게 사는 거라고 순한 눈빛으로 말했다. 순명하는 그 눈빛이 아름답다.

가파르고 험한 길, 눈은 점점 깊어지고... 누군가 딱 한 사람 오늘 우리 앞을 지나간 발자국이 있을 뿐이다.

지붕 위에 소복하게 눈을 이고 있는 삼불사는 멀리서부터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짐승 털이 입에 들어가면 성불하지 못한다 했는데...

그러나 시주돈을 훔쳐가는 도둑이 들끓는 세상이니 맹견에다 CCTV까지 동원할 수 밖에.

 

 

출발해서 3시간만에 햇살다운 햇살을 만났으니 지리산 계곡이 깊긴 깊은가 보다.

삼불사까지 3시간 이상, 울퉁불퉁 돌길에 눈이 덮여 있어 쿳션이 됐는지 다리가 생각보다 가볍다.

문수암까지 다시 한시간을 걷는데 아이젠을 찰까 말까 여러번 망설인다. 눈은 깊지만 오르막이라 견딜만하다.

지리산 암자들 중 조망이 탁월하기로는 문수암만한 곳이 몇 없지 싶다. 천왕봉은 살짝 가려지고 하봉이 보였지만

저 멀리 북덕유와 한가운데 수도-가야 주능선, 오른쪽으로 매화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장쾌한 조망이다.

 

 

 옆 모습이 꼭 사람의 얼굴을 닮은 기이한 바위, 문수암.

 

 

문수암에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난다. 상무주에서 넘어온 일행은 아이젠을 신고 중무장한 옷차림이다. 내리막에 고생 꽤나 하겠다. 

아침에 삼정산 능선으로 붙었다가 암자길로 내려왔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역시 부처님은 우리 편.

문수암을 지나자 길은 더욱 가파르고 험해져 아이젠을 신는다.

상무주암 직전,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후 1시가 가깝다.

머무름도 없는(無住) 높은(上) 경지의 진리란 무엇일까. 상무주암에 홀로 계시는 노스님은 그 경지를 깨치셨을까.

반야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무주암은 오래전부터 막대 두 개가 외부인의 출입을 경계하고 있었나 보다.

 

 

지리산 주능 북쪽의 삼정산 정상을 밟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동쪽으로는 하봉에서 반야봉까지, 서쪽으로는 고리봉에서 만복대를 거쳐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릉까지 다 보인다.

만복대 아래 정령치가 눈에 들어오자 나의 도반은 백두대간의 추억을 떠올리며 환호성을 지른다.

설악의 진면목을 보려면 점봉산으로 가야 하듯이 지리산의 진면목을 보려면 삼정산에 와야 하는 거였구나. 그랬었구나.

사람도 바짝 다가가는 것보다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

    

 

삼정산은 지리산의 명성에 가려 등산객들보다 사찰 순례길로 사랑받는다.  

 북쪽 끝자락의 실상사와 동쪽 사면의 약수암, 삼불사, 문수암. 9부 능선에 있는 상무주암과 영원사, 도솔암을 잇는 7암자길.

그러나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고, 눈길로 하루만에 다 밟기는 어려웠다. 겨울해는 짧고, 마을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으니...

 

 

영원사로 내려가는 길에 만난 도인(?)

산죽이 우거진 숲길에서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바위 위에 가부좌한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가 이르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양지쪽에서 손톱을 깎고 계신 노스님께 도솔암 가는 길을 물었더니 영원사에서 한 시간을 가야 한단다.

지금까지 7시간을 걸었는데 도솔암까지 왕복하면 1시간반... 아무래도 무리다 싶어 곱게 포기한다.

택시를 불러놓고 비탈진 눈길을 걸어내려 오다 보니 개울 건너 도솔암 가는 길이 조붓하게 보인다.

발은 아래로 내려가고 눈은 그 길에 붙잡혀 있다. 저기서 연하천까지 불과 4.7킬로미터... 그립다!

 

 

음정마을까지 걸어갔더라면 중간에 퍼질러 앉아 울 뻔했다.

갤로퍼 택시가 겨우 올라오는 가파른 눈길, 2만원에 실상사까지 우리를 실어다 준 기사님이 남자천사 같다.

 기우는 햇살이 스며드는 임도에서 마지막 사진 한장.

 

 

 실상사에서 네비를 입력하니 울산까지 3시간 10분으로 나왔는데, 차가 얼마나 밀렸는지 4시간 반이 걸렸다.

눈길 7시간을 걷고 장거리 운전을 했더니 온몸이 뒤틀리고 피곤하다.

그러나, 듬직한 도반이 곁에 있어 짜증을 참을수 있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나보다 더 피곤할 것이다.

차가 밀릴 때 장난처럼 셔터를 눌렀다. 지루한 길이 다소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숲 속에 두고 온 도솔암이 아무래도 눈에 밟힌다. 언젠가는 가리라. 혼자라도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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