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함박눈이 내린 산골에서 한밤중에 눈이 떠졌다.

깊은 밤, 눈은 그쳐 있고 해맑은 달이 중천에 떠 있는데 그 광경을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저 유명한

‘월백 설백 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 문장만 떠오를 뿐 어떤 미사여구로도 그 장면을 묘사할 수 없었다.

깊은 감동이나 절실한 감정은 이처럼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

가슴이 벅차서 말이 안 나오고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다. 어떤 차가운 이성도 이 절절한 감성을 누를 수 없다.

사람에 대한 감정도 그런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목구멍이 아려오지만, 어떤 말로도 감정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때가 묻어버릴 것 같아서.


내 초라한 가족사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녀를 필설로 옮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반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말해보지 못했던 내 동생. 생의 반환점을 돌아서며

많이도 뉘우치고 참회했으나 어떤 말로도 그녀의 인생을 보상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는 우리 집의 희생양이었고 나의 영원한 아킬레스건이다.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을 그녀가 대신 졌고 그 십자가는 그녀의 인생에 짙은 그림자를 지웠다.

생각하면 지금도 숨고 싶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은 내가 그녀의 자퇴서에 아버지의 도장을 찍어준 일이다.

그때 막 사춘기에 들어선 동생은 궁핍한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는지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하는 일이 잦았다.

학비를 제때 못 내고 결석을 자주 하게 되니 하루는 담임이 자퇴서를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자퇴서에 부모님 도장을 찍지 않으면 동생을 퇴학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발등을 찍고 싶은 기억이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그 자퇴서에 아버지의 도장을 찍어주었다.

어쩌면 속으로 그녀의 희생이 나를 구할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계산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살림에 한두 살 터울로 4남매가 중고등학교에 다녔으니 나는 수업료 독촉을 받을 때마다

동생들이 많은 게 싫었다.


내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동생은 학업을 접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학교의 ‘급사’가 되었다.

아침마다 물걸레로 교무실 책상을 닦고 바닥 청소를 해야 하는 열다섯 살의 어린 사환이.

그녀의 희생으로 파산 직전의 가계가 겨우 살아났지만 둘째동생이 야간학교를 다녀야 하는 등

이후로도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밑바닥 급사에서 시작된 그녀의 사회생활은 20여년 후 그 학교 서무실 직원으로 퇴직할 때까지 이어졌다.

가련한 그녀는 그 오랜 세월을 부모를 부양하면서 막내 동생을 대학까지 보냈다.

빚을 내서 남동생 학비를 마련하고, 이자를 갚으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내가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동생을 도왔지만 아마도 코끼리 앞의 비스킷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무능해도 포장하거나 미화해서 추억하는 것이 한국적인 미덕인 것 같아서 감히 어떻게

표현할 수는 없으나 그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가족관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막내 동생이 자립하고 그녀가 허리를 펼 무렵 나이는 이미 30대 중반이었다.

효녀라는 칭송은 자자했지만 가난하고 나이 많은 처녀를 반기는 남자는 별로 없었다.

혈색 없는 얼굴로 짓눌리며 살아왔던 동생은 퇴직 후 배드민턴을 시작했다가 제 남편을 만났다.

4살 연하의 어질고 순박한 사진사였다. 그들은 모든 장애를 넘어 결혼했으나 동생은 지금까지도

시어머니의 냉대를 받고 있다. 그 착한 동생이 왜 시어머니에게 사탄 취급을 받는지 교회에 물어볼 일이다.

무력한 부모를 대신해 두 동생의 학비며 생활비를 벌어야했던 그녀는 평생 빚에 쪼들리며 살았지만

한 번도 신세한탄을 하거나 자신을 비관하지 않았다.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정말 욕심 없이 세상을 살았다.

어머니가 평생 소원하던 내집마련, 그 피 같은 재산도 남동생에게 기꺼이 줘버렸다.

가난한 외동아들에게 시집오겠다는 올케가 고마워서 그 집을 넘겨준 것이다.

나는 사실 그 집이 아까웠다. 내 돈도 그 집에 들어갔는데 하고 본전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동생이 나 대신 가장 노릇을 해온 게 너무 미안해서 한 마디도 권리주장을 못했다.

 

서열로는 둘째지만 맏이 역할을 톡톡히 해온 그녀가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건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새벽길에서 어머니를 차로 친 남자는 녹즙을 배달하던 청년이었는데

건널목 사망사고를 냈으므로 유족들의 합의가 없으면 구속될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때 가족들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동생이 결연하게 말했다.

“합의금은 한 푼도 받지 말자. 어머니도 그걸 원하실 거다. 앞날이 창창한 청년을 우리가 살려주는 것이

어머니의 죽음을 의롭게 하는 일이다.”

남동생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뜻에 따라 유족 대표로서 조건없이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나는 사실 합의금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과속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데 대한 책임을 어떤 형태로든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생의 말처럼 어머니의 목숨값을 받아내 가해자를 징벌하는 게 정당하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생을 생각하면 그 청년을 용서해주어야 마땅했으니까.

 

오래 전 둘째 동생이 만삭인 상태로 음주운전자의 차에 추돌해 조산했을 때,

어머니는 돈 다발을 신문지에 싸들고 온 남자를 용서해주셨다.

“내 딸이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부처님 자비요, 당신이 크게 안 다친 것만 해도 부처님 은덕이오.

이 돈은 안 받아도 되니 그냥 돌아가시오.”

70평생을 쪼들리며 살아온 어머니가 돈 앞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내 동생도 고난에 찬 인생을 살아오면서

물질적인 유혹 앞에는 그렇게 의연했었다.

그러나 그 천사 같은 동생이 왜 천국의 하루하루를 살수 없는지 나는 의문이다.

시어머니의 냉대 속에서도 하루 종일 남편과 편의점 계산대 앞에 서 있을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린다.

내가 딱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도 그녀 때문에 죽지 못할 핑계가 된다.

세상 어떤 사람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갖지 않았던 내 동생,

내가 죽으면 그녀가 너무 많이 울 것 같아 나는 죽지 못할 것같다.

눈 속에서 움트는 복수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온 그녀가 언젠가는 활짝 피어날 수 있겠지.

그 희망으로 나는 생의 겨울을 견딘다. 그 소망으로 그녀의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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