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산 자연휴양림 입구 미폭>
철없이 산에 다니던 시절에, 미친듯이 산에 다니던 그 시절에 거창의 산들을 많이 밟았다.
용추계곡에서 시작해 금원~기백을 탔고, 함양 어딘가에서 시작해 황석~거망산을 탔지 싶다.
기억에 남아있는 건 기백산 정상의 날렵한 돌무더기 밖에 없어서 옛날 앨범을 죄다 꺼내봤지만 제대로 된 사진이 없다.
하긴, 동서남북을 모르던 시절이니 뭐가 제대로 보였을까.
<현성산 정상부의 눈부신 슬랩>
현성산이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었다. 해발 960의 바위 봉우리, 아마도 금원산의 명성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한 듯.
말라붙은 미폭(米瀑) 옆구리를 타고 아기자기한 암릉을 올랐다. 때로는 두 발로, 때로는 네 발로.
지난밤 잠을 설친 탓인지 몸이 무겁다. 먼길 나서려면 나도 몰래 긴장하는지 선잠을 자곤 한다.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내가 산에 안 다녔으면 뭘 했을까? 어떻게 풀렸을까?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하지만 역사에 이프(if)가 소용없듯이 한 사람의 생애에도 '만약'은 없다.
어리석었어도 그때가 최선이었고, 나약했어도 그때가 최선이었다.
다시 돌아온다 해도 나는 아마 그 길을 택할 것이고, 뒤늦게 후회하게 될줄 생각도 못할 것이다.
<거창 가조 들판>
어제 내린 비로 대기가 한결 청명해서 산 아래 널널한 들판과 겹겹이 포개진 산들이 깨끗하게 조망된다.
3시 방향으로는 비계산, 별유산, 저 멀리 가야산까지, 뒤돌아서면 금원~기백 주능선이.
비에 씻긴 바위들이 목욕탕에서 막 나온 여인처럼 청신하고 육감적이다. 살을 맞대고 싶다.
땅은 적당히 젖어있고, 미풍은 살랑살랑 불어오고, 맑은 하늘 아래 새들은 무반주 아리아를 부른다.
삐리~ 삐리리~~~ 삐주 삐주~
<현성산 주능선 뒤로 저 멀리 덕유산 향적봉>
현성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병풍을 두른 듯한 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오똑한 높이, 저 낯익은 마루금, 덕유산이다!
주변 산군에 비해 확연히 높은데다가 장쾌하게 이어지는 마루금이 숨을 멈추게 한다. 과연 발군(拔群)이다.
그때부터 내 시야에는 오로지 덕유산만 들어왔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덕유산과 점점 가까워지는 게 신비롭고 황홀하다. 가슴까지 두근거린다.
<왼쪽으로 잔설이 남은 남덕유 정상>
설 무렵에 큰 눈이 왔다더니 불과 보름 사이에 흔적없이 녹아버렸다. 아름다움은 얼마나 잠시이던가.
예전에 왔을 땐 이런 풍광들을 볼줄 몰랐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가르쳐주었는데도 내가 잊어버렸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다.
내 판단도, 기억력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내 생각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것,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많이 느낀다.
<이런 배경 속에 머무는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 몸이 얼마나 버텨줄까. 요즘은 그런 걸 자주 생각한다.
망가진 지 오래된 척추, 두 번이나 칼을 댄 무릎,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고 싶은 이 몸을 어찌 해야 하나.
내 희망수명은 65살. 그때까지 더 악화되지만 말고, 민폐끼칠 정도만 아니라면 어찌어찌 살아낼 수 있지 않겠나.
하루라도 통증없이 일어날 수 있는 날이 없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이 존재의 무거움이여!
나의 온갖 누추함, 온갖 모순을 다 알고 안아줄 수 있는 대상이 없을까?
떠도는 구름처럼 안주할 수 없었던 그 근원에는 사랑에 대한 희구(希求)가 있었던 것같다.
지적 충만으로도 신앙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 갈구의 끝에 이제 산만 댕그러니 남았다.
하루하루 낡아가는 몸으로 산을 바라보는 내 심연은 쓸쓸하기만 하다.
<금원산 정상에서 남덕유 조망>
겹겹이 물결치는 산자락. 너울대며 흐르는 능선. 숨이 탁 막힐 정도의 조망에 넋을 잃고 바라본다.
하늘 끝 지리산으로 뻗어나간 백두대간이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한 눈에 보이는 곳.
금원산 조망이 이렇게 멋진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마주 보이는 황석산~ 거망산도 새롭다.
살짝 기운 햇살에 나뭇가지들이 만들어내는 실루엣이 말할수 없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아무리 멋진 사진도 눈으로 보는 것만큼 아름다울 수 없다.
어떨 땐 차라리 사진을 찍지 않는 게 낫다. 머리 속에 있는 기억이 가장 아름다울 때도 있으니까.
<유안청폭포>
7시간40분 끝에 하산지점으로 원점회귀.
금원산 정상에서 동봉 찍고 내려오다가 유안청계곡을 만나니 해가 기운다.
빙폭이 풀리면서 봄이 오듯이 요즘같이 가라앉은 분위기도 해빙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기대로 다음 산행을, 또 다음 산행을 기다려본다.
희망수명 65세까지.
<거망산 너머 저 멀리 지리산 주능선>
<광대무변한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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