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외가에서 지낸 날이 많았다.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고 힘들었던 엄마가 외가에 나를 자주 맡겼던 게 아닌가 싶다.

외삼촌이 넷이나 되던 외가는 할아버지의 호령이 쩌렁쩌렁 울리던 집이었다.

외삼촌들이 늦잠을 자면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때리던 할아버지.

맞으면서 구령을 붙이지 않으면 한 대 더 때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아들들에게 엄격하고 냉혹했던 외할아버지에 비해 외할머니는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해거름에 찾아든 도붓장수는 문간방에 재워 보내기 예사였고, 그들이 못다 판 물건을 떨이해주곤 했다.

 

‘가마못 아래 기와집’으로 불리던 외가에서 호랑이처럼 군림하던 할아버지의 기세는 큰 아들의 죽음으로 급전직하 땅에 떨어졌다.

집안의 장손이었던 아들이, 결혼하고 딸까지 낳은 아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할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방문을 닫아걸었다.

외숙모의 가출과 외삼촌의 죽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땐 어려서 잘 몰랐다.

호랑이가 굴 속으로 숨어버린 집에서 외삼촌들은 맘껏 늦잠을 잤고,

외할머니는 큰 아들이 남기고 간 아이를 애지중지 기르면서 힘든 세월을 살아냈다.

 

내게 외사촌이었던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할머니는 맛있는 것, 예쁜 것, 좋은 것은 모두 ‘현숙이 몫’이라며 따로 챙겼다.

외가에서 첫 손녀로 사랑받던 나는 어느새 현숙이에게 멀찍이 밀려나 있었다.

월탄 박종화의 글을 머리맡에 두고 읽으시던 할아버지는 결국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외가는 급격히 내리막길로 내달았다.

아버지에게 보스 기질을 물려받은 아들들은 남 밑에서 일하는 걸 견디지 못해 전부 개인사업을 시작했고,

할머니는 부침을 거듭하는 자식들 사이에서 현숙이만 끌어안고 살았다.

 

“아이고 불쌍한 것! 아이고, 내 새끼! 야들아, 내 죽어도 현숙이는 너그들이 거둬야 하니라.”

입버릇처럼 말하셨다. 부모 얼굴도 모르고 자란 손녀가 안쓰러워 앉으나 서나 현숙이 걱정이었다.

사촌들끼리 모여 놀면 행여 현숙이를 따돌리기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현숙이는 어릴 때부터 왠지 어두웠다. 외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비호를 받으면서 자랐지만

사촌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을 많이 주고 관심을 쏟았는데도 현숙이는 어느 해 엄마를 찾아 집을 나가고 말았다.

할머니는 물 한 모금 못 넘기고 헛소리를 지르며 현숙이를 찾았다.

다행히 현숙이는 열흘만에 집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이었다.

 

엄마는 결혼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버지와는 억지결혼으로 살았으나 아이를 낳고 옛 남자에게로 가버렸다.

아버지는 화를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죄 없는 아이만 홀로 남았다.

그게 자신의 역사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현숙이는

엄마가 옛남자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엄마는 냉정하게 말했다. ‘다시 찾아오지 마라. 그게 널 위해서도 좋아.’

 

할머니는 돌아온 손녀에게 아무 것도 추궁하지 않고 예전처럼 떠받들었다.

행여 기죽을까, 행여 욕 먹을까, 보디가드처럼 현숙이를 지켰다.

외삼촌들이 학비를 대주어 학업을 마쳤고 원하던 직장도 갖게 되었다. 쌍거풀 수술도 해주고 겨드랑이 암내 수술도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숙이는 식구들의 기대를 번번이 배신했다.

사귀는 남자마다 결격사유가 많은 사람이었고, 어쩌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 결혼시켰더니 이번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회임에 좋다는 한약을 지어 나르며 한숨을 쉬셨다.

 

말년에는 이 아들 저 아들 형편이 좀 나은 집으로 옮겨다니며 사셨던 외할머니는 백수를 누리셨으나

끝내 현숙이의 행복을 지켜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자식을 앞서 보낸 사람은 그 자식 몫까지 더 산다더라. 그래서 내가 못 볼 꼴 다 보면서 이리 오래 사나 보다.

현숙이만 잘 살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텐데.”

온 가족이 감싸주고 사랑을 주었으나 저 혼자 외로워하며 사랑을 받을줄 몰랐던 현숙이는

어느 해 살던 남자와 헤어져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주민등록증을 남긴 채 사라진 그녀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할머니는 점집을 드나들며 무당에게 현숙이의 행방을 물었으나 손에 잡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눈 감기 전까지 현숙이를 찾던 외할머니에게 그녀는 평생 아킬레스건이었던 셈이다.

측은지심 하나로 끌어안고 살았던 질기고도 아픈 아킬레스건.

그러나 슬프게도 현숙이의 아킬레스건은 할머니가 아닌 엄마였던가 보다.

당신의 아킬레스건이 다칠세라 전전긍긍하던 외할머니의 외골수 사랑과 엄마를 잊지 못한 현숙이의 외로운 짝사랑은

불완전 소통으로 끝나고 말았다.

 

세상엔 참 아픈 사랑도 많다.

온몸을 바쳐 평생을 희생하고 사랑을 쏟아부어도 그 사랑을 받을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번번이 돌아서는 사람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입으로만 사랑하고 가슴으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불가해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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