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는 신랑이 미워 죽겠어요. 생각만 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요.”

남편이 밉다고 자주 하소연하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공공연히 남편을 ‘우리집 밉상’이라고 부른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남편 흉을 볼 때도 있다.

소심하고 쩨쩨한데다 잔소리까지 심해서 콱 쥐어박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란다.

현모양처의 전형처럼 가정에 충실하고 살림 짭짤하게 잘하는 그녀가 남편을 미워한다니 뜻밖이다.

부부 문제는 부부만 알 수 있는 법이니 내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지만

남도 아닌 남편을 미워한다는 말이 썩 듣기 좋은 건 아니었다.

 

“미워하면 너만 손해여. 살살 꼬여서 데리고 살어.

남편이 변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고 네가 변해서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봐.

기왕 남편에게 묶여 살 거면 살랑살랑 꼬리도 좀 흔들어주고....

나이 육십이 금방이다. 미워하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니?”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원론적인 얘기로 그녀의 하소연을 무마시키고 있었다.

남편이 없다고 생각해봐라. 비참하지 않니? 자식들이 아무리 잘해도 남편 자리를 대신하진 못한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줄 사람은 남편뿐이잖아. 사이좋게 잘 지내.“

 

그녀는 얼굴이 새치름해지며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순간적으로 아차 했다.

그녀는 위로가 필요했는데 나는 충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입장이 되어 함께 남편을 매도하고 힐난이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적극적으로 그녀의 편이 돼주었어야 했는데.

뭐 그런 남자가 다 있니? 너 참 대단하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니? 나 같으면 벌써 헤어졌겠다.

얘, 너 고생한다. 대단하다.... 그렇게 말했어야 하는 건데 남편이 얄밉고 싫다는 여자에게 꼬리 흔들어주며 잘 살아보라니,

이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다.

 

어쩌면 나는 남의 가정사나 복잡한 감정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녀에게 위로보다 충고를 먼저 처방했던 게 아닐까.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방어적인 처신인가.

갈등을 푸는 방법은 설득이나 충고가 아니라 상대방의 심정을 먼저 헤아려주는 것인데 공감보다 훈계를 앞세우다니.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돌아서더니 이후 남편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모임에서 만나면 피상적 얘기만 나누고 눈길을 돌렸다.

짐짓 마음이 통하리라고 믿었던 내게 실망한 탓일게다. 내심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내 옹졸한 심사가 들통나서 창피했다.

사람마다 자기 입장이 있고,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는 자신이 옳고 억울하고 힘들다.

혼자 힘들어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데

상대방은 시쳇말로 대인배(大人輩)인척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면 얼마나 약오르는가?

사람은 크게 상심하거나 머리속이 복잡할 때 누군가로부터 공감받고싶어한다.

누군가 나의 아픔과 괴로움을 내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주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오래전 아들의 거취 문제로 고민하는 나에게 어떤 친구가 던진 말이 생각난다.

“아들 하나라고 과보호하지 말어. 우리 아들은 저 혼자 알아서 다 하던데 뭘 그래?

우리 아들은 군대 가있을 때도 내가 면회 한번 안 갔어. 대학 다닐 때 방도 저 혼자 구하고,

직장도 저 알아서 잘 들어가대. 지금까지 속 한 번 안 썩였어. 자식은 강하게 키워야 하는 거야.”

아들 걱정에 심란한 내게 그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그녀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모든 기준이 자기에게 맞춰져 있으니 남의 처지나 입장은 고려하지도 못한 것이다.

모자란 아들 걱정에 전전긍긍하는 못난 어미가 된 나는 쓸쓸한 심경이 되어 내뱉었다.

 

그래, 니 팔뚝 굻다. 그런데 얘, 잘난 네 아들하고 못난 내 아들하고 똑같니?

사람 사는 게 층층만층 구만층인데 좀 모자란 사람도 안 있겠냐? 내가 힘들어하면 진심으로 들어주고 위로나 좀 해주라.

누가 니 아들 자랑 듣고 싶다니?

생각해보니 대개 우리의 소통 방식은 자기중심적인 게 대부분인 듯하다.

상대방 입장에 서서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 내 경우를 빗대어 설득하려 하는 것. 혹은 충고하려 드는 것.

그러나 아서라. 충고는 상대방이 원할 때만 들려주는 게 현명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충고라는 명분으로 상대방의 가슴에 못을 박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지.

그걸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지는지.

살아갈수록 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위로가 필요해 찾아온 사람에게 어설픈 충고로 상처 주는 일은 없어야겠는데. 아, 그게 그리 쉬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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