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여 년 째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나를 보고 지인이 농담처럼 말했다.

“아들한테 블로그 물려줄 생각일랑 말어. 며느리가 욕한단 말여.

시에미란 년이 재태크를 제대로 해서 유산이나 듬뿍 물려주지 않고, 그까짓 글이나 사진이 무슨 소용이겠어?”

그녀의 말인즉, 요즘 며느리들은 약아빠져서 시부모의 재력을 최우선으로 친다나.

나같이 대책 없는 로맨티스트는 며느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시부모에 속한단다.

아들이사 제 부모니까 이해하지만 며느리는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옷깃을 스치지 않고도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사이버공간이 좋아 나의 모든 흔적을 블로그에 담아놓았는데,

문득 그 소중한 기록들이 누군가에겐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하도 험해 언제 무슨 사고로 저승사자의 손에 끌려갈지 몰라서 나이가 들면 영정사진도 찍어놓고

 ‘사전 장례 의향서’같은 걸 써놓는 게 좋겠다는 게 평소의 내 생각이었다.

 재산이야 남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더라도 내 정신적 유산만은 내가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걸어온 흔적과 내 생각이 담긴 블로그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이유다.

성년이 된 이후 대화가 부족했던 아들에게 엄마의 정체성을 전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아들은 사실 내 블로그의 존재를 모른다.

내가 녀석의 직장생활 내막을 모르듯이 아들 또한 에미의 사생활을 짐작도 못할 것이다.

물리적인 거리도 있거니와 사회생활에 바쁜 아들과 노후대비에 들어선 나는 서로 ‘노는 물’이 달라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엄마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블로그를 유품으로 받게 되면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인의 말처럼 며느리 손에 건너가 핀잔과 구박을 받다가 클릭 한 번으로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유품이 생각난다.

형체도 없는 사이버 유품을 남아있는 사람이 갈무리하여 실존으로 되살린 책.

한정 수량으로 인쇄된 그 책은 시중에서 구할 수도 없지만 고인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죽마고우 두 친구가 있었다. 반평생이 넘도록 두 사람은 고향에서 같이 살며 직장을 잡고 결혼해 자리를 잡았다.

약속이나 한 듯 자식을 둘씩 낳았고, 큰 우환없이 중산층의 대열에 합류했다.

승승장구는 아니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생활에 안정감을 느끼며 살고 있던 그들에게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 친구의 아내가 말기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망연자실했지만 환자를 살려보려고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때만 해도 말기암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방사선치료와 항암제도 한계를 드러내 환자의 고통만 점점 심해졌다.

남은 세 사람, 특히 당사자보다 친구 부부의 정성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부모 형제도 그렇게 간병하진 않을 거라고 주위에서 모두 입을 모았다.

환자에게 좋은 약이라면 천리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고, 환자가 원하는 것은 값을 따지지 않고 구해주었다.

 

그러나 세 사람의 정성도 보람없이 환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가 떠나고 한참 뒤 주변을 정리하던 세 사람은 생전에 고인이 블로그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남긴 블로그에는 생활 속에서 느낀 생각의 편린과 시어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의 남편조차 아내가 시를 좋아하고 글을 써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사이버에 남아있는 아내의 글을 보고 남편은 그동안 자신이 아내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무심한 세월이 아픔을 보듬어 안고 일 년이 흘렀다.

한 사람이 없는 자리에 낯선 책 한 권이 놓여졌다.

호화 장정도 아니고 출판사를 통한 인쇄도 아니었지만 그 책 한권은 아내를 보낸 남편의 가슴을 또 한 번 세차게 흔들었다.

아내가 남긴 글에 죽마고우가 찍은 사진을 넣어 만든 책. 그걸 굳이 포토에세이니 유작집이니 이름을 붙인다는 건 의미가 없었다.

남자는 아내의 흔적보다 친구의 정성과 우정에 감동해 울먹이고 말았다.

 

친구는 고인이 블로그에 남긴 글을 읽고, 그 글에 맞는 이미지를 구하러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꽃비 내리는 공원길, 낙엽 흩날리는 아스팔트, 감이 주렁주렁 열린 산촌, 눈 덮인 오지 마을.....

고인의 글과 어울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 그는 나름대로 출사 계획을 짜서 사진을 찍었다.

아무도 몰래 고인의 추억이 깃든 장소와 좋아했던 이미지를 찍어 고인의 글과 편집해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세련된 출판물은 아니었지만 서점에 나와 있는 어떤 책보다 귀하고 값진 책이었다.

 

아내를 보낸 남자는 그 책을 여러 권 찍어 아내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것이 아내에 대한 마지막 사랑이었고, 친구의 우정에 대한 보답이었다.

고인이 남긴 무형의 재산에 그를 추도하는 사람이 색깔과 옷을 입혀 만든 한 권의 책은 그녀가 지상에 남기고 간 마지막 발자국이 되었다.

아내와 사별한 친구를 위해 고인의 추억을 한 권의 포토에세이로 만들어낸 남자.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멋진 일을 생각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막연히 좋아서 찍고, 남들 찍으니까 찍고, 보여주기 위해서 찍고. 공모전 수상을 위해 찍고.

그런 것도 좋지만 사랑과 정성을 담아 누구에겐가 울림을 줄 수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추억에 자신의 정성을 입혀 새로운 작품을 남길 수 있다면 진정으로 성공한 사진가 아닐까.

백 명에게 한번씩 읽히는 책보다 한 명에게 백 번 읽히는 책이 낫듯이

사진 또한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보다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주는 게 낫다고 생각된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사진 한 장쯤 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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