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히 보이는 천문대를 두고 얼마나 돌고 돌아 갔던 길인지.

생각하면 산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몰라.

돌고돌아 결국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

 

절골 들머리에 서 있는 '별빛마을' 이정표.

이름마저 이쁜 그 마을에는 밤마다 별이 쏟아져 내리겠지.

구들장을 쪼개 쌓은 듯 비슷한 두께의 돌들이 탑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나

갈미봉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임도를 두고 길없는 길을 헤쳐나가는 재미란!

 

                                                                            <갈미봉 내림길>

 

버겁지 않을만큼 적당한 경사에 적당한 바람, 적당한 기온.

다리 길이만큼 준족을 자랑하는 남정네들이 휑하니 달아나거나 말거나

콤파스 짧은 다리로 최선을 다해 갈미봉(789m)에 이른다.

잔설이 남아있는 내림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작은보현산으로 갈라지는 지점(832봉)을 찍는다.

 

 

                                                                                                   <전망터에서 본 작은보현산>

 

포항과 영천의 시경계를 이루는 능선. 이름값 하느라 바람이 꽤 차다.

귀를 싹둑 자르고 콧날을 날름 베어가는 눈바람에 나도 몰래 자라목이 된다.

버젓한 임도를 두고 숲길로 숲길로 숨어든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낙엽이 가슴속에 희열로 차오른다.

 

천문대 근처 응달진 눈길을 걸을 땐 사그락사그락 눈 밟는 소리.

가는 채에 친듯 입자 고운 눈들이 길 위에 곱게 깔려있다.

천문대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산이 기룡산. 산세가 험하지 않고 능선이 

편안해 보인다.

 

 

유성우가 내리는 밤이었을까?

어느 사진작가가 찍은 명작이 천문대 전시실에 걸려있다.

 

 

 폭설에 묻힌 보현산 천문대. 역시 전시실 벽에서.

 

                                                                              <연무 너머 저 멀리 팔공산이 보이고...>

 

보현산에 따로 시루봉이라는 명칭이 있는줄 몰랐다.

천문대 오른쪽으로 시루봉 정상석(1,124m)이 서 있는데

옛날에 할미꽃 캐러 왔던 기억이 살아난다.

유난히 자주색 할미꽃이 많던 그 일대가 시루봉이란 말이지?

역시 아는만큼 보는 거야...

희뿌연 연무 저 멀리 아득히 솟은 팔공산, 한달음에 달려가 만나고 싶다.

 

                                                                                                                        <기룡산>

 

팔공산을 조망하며 법룡사로 하산하는 길은 겨울해만큼 짧았다.

10시 등반 오후3시반 하산-내 사전에 없는 기록이다.

산 허리를 자른 임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겨울 보현산은 결코 보배롭지

않았지만 오늘 산행이 기억에 남는 것은 하산주의 그 달콤한 맛 때문이리라.

허리 굽은 할머니가 손수 담갔는지

옛날 엄마 손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동동주에다

땅에 묻은 김치를 금방 꺼내 썰어주는 그 투박함이 얼마나 살가웠는지.

 

과분하게도 천문대 전시실 현관에서 따뜻한 점심을 먹은데다가

하산주까지 향기롭게 마셨으니 오늘 일진이 좋은 편이다.

감독도 없고 코치도 없이 여유롭게 산행하고 풍족하게 마셨으니

얼치기 산꾼의 하루가 이만하면 족하다 하지 않으리?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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