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손 내밀기를 잘했지. 암, 잘했구말구. 

너를 만나러 가는 내내 안온하고 행복했다. 지난 얘기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다짐했다.

충고보다는 위로가 필요한 우리 나이, 더 이상 서로를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모처럼 시야가 확 트인 하루, 금정산 주능선에서 멀리 해운대 장산이 보인다.

묵은 친구가 이래서 좋은가 보다. 1년만의 만남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편안했다.

 

 

 

 

"새록새록 니 생각이 나더라. 니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난 왜 니 정성을 그리도 몰랐을까?"

"너도 나한테 잘했잖니. 사실은 내가 너한테 푹 빠져있었지."

"그런데 나는 너에게 받은 것만 생각난다. 내가 해준건 아무 것도 없는것 같아. 그래서 더 미안하고 괴롭더라."

"일생을 통해 너한테만큼 정을 준 친구가 없었다. 언제나 니가 내 빽이라 생각하고 든든했었다."

 

 

 

 

우리는 정상에서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가에, 입가에, 서서히 주름이 짙어지는 중년의 얼굴...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금정산 상계봉 바위능선을 넘어서자 발 아래 낙동강과 화명동, 저 멀리 토곡산이 다가왔다.

동문-남문-서문-북문으로 금정산 종주를 했던 게 몇년 전이던가.

남문 근처에서 마신 막걸리 한 사발에 발걸음이 헛놓이던 기억이 난다.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내 친구라는 핑계로, 나는 너에게 필요 이상의 기대와 충고를 했던가 보다.

내 가치관으로 너를 묶을 필요가 없건만. 내 기준으로 너를 단죄할 자격도 없건만.

지나고 보니 그 또한 욕심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인정했어야 했는데...

 

 

 

 

 30년 넘는 세월 널 잊은적 없었다. 헤어져있는 동안에도 늘 생각했다.

언제나 너를 독점하고 싶었고, 그래서 질투하기도 했고, 배신감으로 가슴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다 양보할 수 있다. 네가 행복하다면 어떤 것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

 

 

 

 

상계봉을 배경으로 해바라기를 즐기는 만삭의 흑염소.

경계심을 버리면 매사가 편하다는 걸, 염소의 굼뜬 동작에서 느낀다.

선입견, 피해의식, 독점욕. 그런 것들만 버려도 인간관계가 훨씬 편안해질텐데.....

 

 

 

 

누가 뭐래도 네 인생은 너의 것!

이제 너에게 어떤 쓴소리도 하지 않을게. 너에 대한 욕심을 버릴게. 그게 진정한 우정이란 걸 깨달았어.

 

 

 

 

외로울 때, 슬플 때, 네가 혼자 오곤 한다는 석불사 바위 능선도 잊지 않을게.

내가 조금만 더 마음을 넓게 가졌더라면 너를 포용할 수 있었을텐데. 너 혼자 산을 헤매도록 놔두지 않았을텐데.

미안하다, 친구야. 정말 미안하다!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도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 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도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의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김용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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