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풍경을 보고 온 날은 밤새 잠을 설친다.
깍아지른 절벽 중간으로 실뱀처럼 나있는 저 길은 험준한 산과 아찔한 협곡을 잇는 차마고도를 닮았다.
넓고도 좁은 게 세상이라더니, 생각지도 않았던 옛친구와 산길에서 만난 두 사람.
신혼시절 한 동네에서 살았다는데, 그 두 사람을 내가 만나고 있었는데도 여태까지 서로 모르고 지냈다.
그러니 매사에 때가 있는 게 맞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난다.
사자평에서 표충사로 내려오면서 저 길을 몇번이나 걸었는데,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간담이 서늘하다.
길 위에 있을 때는 위험도 스릴도 못 느꼈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아찔하기 이를데 없다.
우리가 건너온 세월도 저런 구간이 있었지. 지나고 보니 참 운이 좋았다 싶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야!
눈으로 보는 것만큼 사진이 잘 표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자꾸 사진에 욕심을 내게 된다.
오늘같이 청명한 날, 시간만 넉넉하다면 순광을 기다렸다가 저 길을 제대로 찍어보는 건데... 아깝다!
표충사에서 진불암으로 올라 재약산 정상과 사자평 가는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문수봉을 만난다.
전망대 너머 가운데가 문수봉, 맨 끝이 관음봉. 햇살에 실핏줄이 드러나는 나무, 나무, 겨울나무들.
1대간9정맥을 끝내고, 국내의 웬만한 산도 다 밟아본 친구가 "설악산 빼고는 우리나라에서 영남알프스가 제일 좋더라." 했다.
릿지, 협곡, 하다못해 억새평원까지 골고루 갖춘 곳. 누구 말마따나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영남알프스!
암벽이 현란해 눈을 뗄 수가 없다.
잎새 무성한 여름이나 화려한 단풍도 좋지만 이렇게 다 벗어버린 겨울산도 얼마나 멋진가.
화장기 없는 얼굴처럼, 가식없는 사람처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 겨울산이여!
진불암 왼쪽 멀리 푸른 하늘에 머리를 담그고 있는 사자봉.
빈 암자에 장작불 때고 하룻밤쯤 묵어가고 싶다. 부처님 집인데 설마 귀신이야 나올라구?
올해 연말은 어느 해보다 마음이 가볍고 즐겁다. 버릴 건 버리고 잊을 건 잊고 품을 수 있는 건 사정없이 품기로 했다.
이기적 유전자는 정신세계에도 작용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니까.
살아온 세월은 다르지만, 타고난 성품은 다르지만, 오늘 이 산 위에서 우리는 한 마음이다.
남은 세월 좀 더 아름답게 살고 싶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싶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친구로 남고 싶다.
관음봉 바위 능선 아래 저 멀리 표충사가 보인다.
영남알프스 일대를 그렇게 누비고 다녔어도 문수-관음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조망이 이렇게 아름다운줄 몰랐다.
"아들이 내 인생에 1순위였는데, 아들에게도 내가 1순위인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 이제 내 1순위를 아들 1순위한테 양보해야겠지?"
자식에게 인생을 걸었던, 자식이 희망이었던, 이 시대 수많은 어머니들의 그 허탈감을 친구는 지금 느끼고 있다.
머지않아 나도 그런 상실감을 느끼게 될까.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다는데.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곰곰 생각해보니 사랑이었다.
사랑을 쏟아부을 대상이 없어서 우리는 지금 허전하고 쓸쓸한지도 몰라.
누구 말처럼 많이 베풀고, 돌아올 것은 생각지 말아야지. 그래야 곱게 늙는 거란다.
하산해서 올려다본 문수봉, 관음봉(오른쪽)
생각지도 않은 만남에, 기막힌 루트에,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산행이 될것 같다.
재약5봉(필봉-사자봉-수미봉-재약봉-향로봉)의 첫 봉우리인 필봉이 위풍당당하다.
표충사를 감싸고 도는 재약5봉 코스를 다시 밟을 수 있는 날이 올까?
하늘 아래 무구한 하루가 갔다.
총체적 부실의 몸뚱이로 이만큼 걸을 수 있어 다행이고, 몸보다 마음이 더 상했던 시간도 다 흘러갔으니 홀가분하다.
<이 토끼는 T.V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온 적이 있는데 예불할 때마다 법당 앞에 와서 다소곳이 앉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