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없는 감(반시)으로 유명한 청도 매전마을에서 육화산을 올랐다.
낮게 깔린 연무 때문에 가까운 곳은 안 보이고 저 멀리 높은 봉우리만 보이는 기이한 날씨다.
온 산이 푸를 때는 저 소나무가 그리 잘나 보이지 않았다. 모두 잘났다고 뽐낼 때 소나무는 고요히 침묵하고 있었다.
자, 이제 때가 왔다. 독야청청, 네 존재를 마음껏 드러내렴!
어이, 친구! 멋지구만~
느닷없이 불러냈는데 득달같이 달려와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서방마마 용안도 편안해 보이시고, 자네 신수도 훤하더구만.
이제 한 세상 멋지게 놀다 갈 일만 남았네. 자네, 그동안 마음 고생 많이 했네.
연무 속에 솟아오른 청도 화악산(왼쪽 상단)만 겨우 가늠될 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매전마을회관-감 농장-전망대-암릉-육화산 정상-흰덤봉-매전마을 (5시간30분 소요.)
매전마을은 가을날 마을 전체에 주렁주렁 달린 감들로 장관을 이룬다.
1대간9정맥을 완주한 성냥팔이 아줌마와 '소문은 안 났지만 프로' 산친구 ㅎ
그들 사이에 끼어 나도 도매금으로 넘어간다. 얼치기 산꾼이 프로 산꾼으로.
때로 삶은 아주 구태의연해 보인다. 더 이상 가슴이 뛰는 일도 없고,
삶에서 맛볼 것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사는 게 참 재미없다.
모든 것이 익숙하고 모든 것이 낡았으며 모든 것이 지나간다.
한때 나를 사로잡았던 열정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새롭게 다가올 열정까지 미리 빛바래게 만든다.(중략)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들여 나조차 내 안의 뜨거움을 믿지 못하게 될 때, 그때부터 사람은 늙기 시작한다.
<한명석 '늦지 않았다' 중에서>
매전마을 입구 감나무밭 속에 들어앉은 장연사지삼층석탑.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이 석탑은 도괴(倒壞)되어 하천에 있던 것을 복원했다고.
냇가의 낮은 구릉에 오두마니 앉아있는 석탑이 어쩐지 처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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