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 남벽 전경, 눈이 부셔 오래 바라볼 수가 없다. 가슴이 울렁거려 숨이 가쁘다.
이 한 장면을 눈에 담으려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다. 장장 11시간을!
밤배 위에서 바라보는 무인등대와 저 멀리 영도의 야경.
새벽달이 눈웃음치는 어리목의 여명, 이제부터 설국으로 들어선다.
새벽 빛이 남아있는 눈산호숲에서.
CPL 필터를 안 썼는데도 하늘이 저렇게 푸르다니!!!
흰 산호는 푸른 하늘에 머리를 담그고 바람에 일렁일렁~
어리목~윗새오름~ 돈내코까지 눈길 6시간은 환상 그 자체다.
배 고픈 고라니 한 마리는 저 눈길을 걸어 어디로 갔을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설원에 악센트처럼 구상나무가 박혀 있고...
눈으로 붕대를 감은 겨울나무.
목재 난간이 눈에 뒤덮여 형체만 보인다. 만세동산 전망대 가는 길.
백설 캬라반. 생계를 위해서라면 저렇듯 신나게 걷진 않겠지.
백록담 서북벽의 아찔한 위용. 신비롭고 아름다워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구름 위로 서서히 솟아오르는 저 산봉우리들은 한라산의 또 다른 선물.
모노레일이 설원에 제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이 이채롭다.
눈이 깊어서 길 아닌 길로 들어서면 허벅지까지 푹 빠진다.
윗새오름 대피소도 눈 속에 파묻혔다. 대피소 근처에 있던 사진기자가 말했다.
"오늘같은 날은 1년에 며칠 안 됩니다. 정말 일정을 잘 잡아 오셨네요!"
고사목이 눈을 맞고 회춘하는 모양이다. 저토록 눈부신 정염이라니!
눈 터널을 빠져나오면 또 다른 눈 언덕이 기다리고...
염려했던 악천후는 간밤에 다 물러가고 심설등반으로는 최적의 조건!
백록담 서북벽이 바로 눈 앞에!
폭설이 쏟아져도 쌓이지 않는 험준한 직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댄다.
거기서는 천천히, 좀 더 천천히 걸으세요.
눈꽃 터널 속에 머무는 그 순간은 천국의 시간이니까요.
방아오름샘 앞에서 남벽을 향해 샷~
남벽 분기점부터 돈내코까지는 설화가 전부 땅에 떨어졌다.
서귀포의 따뜻한 바람이 구름을 밀어올리더니 삽시간에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제주의 돌담은 엉성한 것 같아도 세찬 바닷바람에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얼기설기 쌓은 돌담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빈틈없는 완벽주의자나 대쪽같은 성품보다 좀 느슨한 사람이 인간적이지 않을까.
돈내코로 하산해 뒤돌아보니 정상부만 하얗게 솟은 한라산이 먼 이국의 풍경같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저 산이 그렇게 멀었더란 말인가!
무박3일째 돌아온 부산연안여객 터미날.
덥고 시끄럽고 지저분한 객실에 특유의 기름냄새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지만,
한라산의 환상적인 설화가 그 모두를 상쇄하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