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초행길에 홀딱 반해 '차마고도 루트'로 이름 붙인 곳.
봄물 오르면 다시 가야지 하고 벼르고 별렀다. 숲이 무성해져 저 길이 덮이기 전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해발 1천미터는 아직 겨울이었다.
들머리에서 연두와 초록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 봄물은 5부 능선을 채 밟지 못 했다.
올해는 3,4월 내내 쾌청한 날이 별로 없어 기분마저 우중충했는데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이 그동안의 우울을 상쇄해주고도 남았다. 좋은 벗들과 이렇게 아름다운 날을 함께 누리다니!
표충사 왼쪽 내원암 옆길로 들어서 가파른 오르막을 두어시간 치고 올라 진불암을 만났다.
지난 겨울 비어있던 암자에 오늘은 지장전 문도 활짝 열려있고 노스님도 계신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을 꼽으라면 아마 이런 날들 중에 꼽지 않을까.
청량한 공기 속에서 좋은 벗들과 산 위에 함께 머무는 순간들. 세속의 어떤 것들도 저 순간보다 멋질 수 없다.
표충사에서 사자평고원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임도. 봄물이 파르라니 능선을 타고 오른다.
요즘 비가 잦아서인지 겨울에 보지 못했던 폭포도 두어 줄기 생겼다.
문수봉에서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암릉. 저 멀리 재약5봉의 하나로 꼽히는 향로봉이 보이고...
아침 신문에서 홍신자(전위무용가. 70세) 씨가 독일 출신의 한국학자와 결혼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A 왈 "남자는 그렇다 치고, 여자가 그 나이에 왜 결혼을 해? 귀찮게스리!"
B왈 "아마 해프닝일 거야."
70대에 연애할 수 있는 열정이 어디냐. 요즘 유행하는 우스갯소리로 70대 연애는 신의 은총이라는데.
나이 들수록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진짜 '내 편'이 필요하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줄 단 한 사람.
홍신자 씨는 아마 그런 사람을 만났는지도 모른다. 그게 70이라고 해서 타인의 지탄을 받을 필요는 없다.
신의 은총같은 햇살 아래 마음에 점을 찍는다. 은혜로운 點心이다.
진불암 아래 수직 절벽. 아찔한 단애가 오금이 저린다.
"이만하면 됐지 뭐. 이만큼 살면 잘 사는 거지 뭐." 산 위에서 친구는 자주 그런 말을 한다.
그녀의 남편은 최근에 수억원대의 연쇄부도를 맞았다.
설 추석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쉬지 않는 그 성실한 남자, 그러나 한번도 쨍하고 해뜰날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울지 않는다. 아직 굶지 않으니 다행이고, 아직 산에 다닐 수 있으니 다행이란다.
간장 종지만한 내 그릇보다 그 친구 그릇이 훨씬 크다.
그런데 왜 운명은 종종 그런 사람들에게 후하지 못한 것일까.
우리집 김기사, 오늘 가문의 영광을 맞았다. 불세출의 미인들과 한 자리에 서다니.
허물 많은 나를 데리고 살면서 그동안 참 많이도 삭았는데...
복사꽃이 역광에 너무 아름다워 수십번 날린 샷.
하산해서 올려다 본 풍경.
왼쪽 절벽지대 안쪽에 진불암이 있고, 단애를 마주보면서 산을 올라 재약산 마루금에 이른다.
표충사 인근 숲 속은 온통 연두빛 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