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창 밖을 보고 등산을 결정했다. 전날 충주까지 문상 다녀온 옆지기를 깨워 배낭을 꾸렸다.

아침 노을이 저렇게 아름다운데 어떻게 누워 있나. 어떻게 집에 있나. 오늘 같은 날 산에 안 가면 평생 후회하지 아마.

하양마을(밀양군 산내면)에서 운문산 남릉을 탈 거라던 산친구에게 부랴부랴 전화를 넣고 1시간만에 출발 준비 끝.

나는 초겨울 코 끝이 매운 날씨를 좋아한다. 청명하다 못해 얼음장같이 차가운 하늘, 볼 시린 바람...

 

낙엽이 너무 많은데다 사람 발길이 잦지 않은 코스라 그랬을까, 산행대장이 길을 잃었다. 초입부터 거친 너덜을 20분 이상 오르더니

코가 땅에 닿을듯 가파른 비탈. 스틱도 소용없어 네 발로 기어 올랐다. 길 없는 길에 낙엽은 미끄럽기 짝이 없고...

 중앙능선에 올라서기까지 꼬박 2시간 이상 빨치산 산행을 했다. 근래 보기 드문 악전고투. 이젠 늙었는지 이런 고생이 싫다.

아침 노을이 참 좋았는데 산행 일진은 영 별로구만. 속으로 투덜거리다 정상 부근에서 쾌재를 불렀다.

세찬 바람이 연무를 쓸고 가버린 탓일까, 더없이 맑은 시야에 서쪽 멀리 지리산 주능선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정각산 너머 겹겹이 포개진 산그리매와 날개를 펴고 수많은 산들을 죽지로 감싸안은 듯 창공에 우뚝한 지리산.

오름길의 고통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영남알프스에서 저렇게 선명한 지리 주능선을 보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세상살이도 저랬으면 좋겠는데. 지리멸렬하게 살다가도 단 한번 해 뜰날 있었으면 좋겠는데.

산다는 게 재수요 복불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재수 좋아 살아 남은 날. 내가 잘 나서가 아니고, 다만 운이 좋아 살아남은 날.

스물한 살 꽃다운 청춘 하나가 제대를 하루 앞 두고 연평도에서 포탄을 맞았다. 그 건장하고 잘생긴 사나이가 왜?

운명은 왜?를 용납하지 않는다. 부르면 가야 한다. 순전히 운수 소관이다. 산다는 건 복불복(福不福)이다.

오늘 아침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어 행운이었고, 산정에서 지리 주능을 볼 수 있어 과분한 행복이었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랄까.

 

 

                                                                                                                           

                                                                                                             <똑딱이로 쭉 당겼더니 사진이 별로... 맨 뒤 스카이라인이 지리 주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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