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창 밖을 보니 안개가 짙게 깔렸다. 겨울 안개치고는 너무 짙다 싶어 창문을 여니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젯밤 염포산 일대에 산불이 났다는 보도를 들었는데 그럼 밤새도록 탔단 말인가? 숲을 태운 연기는 염포산 능선을 넘지 못하고 온 마을에 베일을 씌워놓았다.
날이 밝아오자 산림청 헬기들이 집 앞 저수지에서 물을 길어 나르기 시작했다. 염포산은 우리 아파트 길 하나 건너에 있다. 정상까지 걸어서 40분.
밤새도록 수백명의 사람들이 불을 끄느라 아우성이었을텐데 무신경하게 잠을 자다니, 한심하고 어이가 없다.
매년 겨울 산불이 자주 나서 방화범에게 현상금까지 걸려있는데 여봐란 듯 또 다시 산불. 그것도 세 군데서 동시다발적으로.
2주만에 산에 간다고 반가워라 했는데 갑자기 심란해진다. 사회가 불안하다. 지도층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봐라. 나라가 안 망하겠나.
내일 폭동이 나더라도 나는 오늘 산에 간다. 전쟁이 난다 해도 도망가지 않으리라. 지금 죽어도 호상 아닌가?
낙엽이 허벅지까지 쌓인 길을 걷는다. 물살을 헤치듯 낙엽살을 헤치고 간다. 그냥 이대로 나뭇잎에 묻혀도 좋겠다.
영산대학교 뒤 안적암에 차를 두고 주남계곡 따라 1시간이면 노전암에 이른다. 오늘은 노전암을 경유해야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
1식20찬의 노전암 점심 공양.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밥상. 아니, 관심조차 없었던 절밥.
등산해서 12시쯤이면 대개 산 정상 근처에 있을 시간이니 그동안 절밥과는 거리가 멀었다. 십수년간 노전 앞을 지나다녔어도 공양은 처음이다.
짭짤한 밑반찬에다 깔끔한 나물, 신선한 해산물에다 부침개까지... 마늘 한톨 쓰지 않고 정성으로 간을 맞춘 음식에 마음의 허기까지 지웠다.
배고픈 중생들에게 아무 조건없이 날마다 점심 공양을 베푸는 7순의 능인스님을 보고 문득 정일근 님의 시가 생각났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 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낮아 /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숫가락 높이 들고 /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 한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썪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떄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처럼 앉아 /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부처님 밥을 얻어먹고 밥값을 못 해서야 쓰겠나. 노전암 앞 지능선을 타고 정족산을 오르기로 했다.
코가 매운 날씨에 낙엽은 미끄럽고... 10여년 전에 딱 한번 올랐던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았다. 해 떨어지기 전에만 하산하면 되겠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종교는 '편리교'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경전은 '순간경'
내 종교(생각)만 옳다는 고집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갈 것.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