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보러 갔더니 꽃은 하마 지고, 시든 꽃잎만 뭇사람들 발길에 밟혔더라.
어즈버 눈꽃이여, 푸른 하늘에 산호처럼 피어있던 그 눈꽃이여. 내가 가면 언제라도 활짝 피어나지 싶었더니
낙심천만 하산하는 내 발걸음이 쇳덩이보다 무거웠니라.
외로운 내 그림자가 국망봉을 거쳐 구인사로 이어지는 소백의 주능을 담고 있네.
일행을 뒤에 두고 점심도 굶은채 허위허위 올라온 보람도 없이 정상엔 세찬 바람만 휘몰아쳤지.
소백산 똥바람은 여전하더만. 삽시간에 온 몸이 얼어붙고 사지가 경직되는 강추위. 나는 채 5분을 견디지 못했네.
캄캄한 새벽 별빛에 길을 물어 죽령에서 연화봉까지 입 한번 떼지 않고 걸었던 적도 있었고
비로봉을 내려서다 눈폭풍에 휘말려 구르다시피 걸었던 적도 있었네.
단양 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이 겨울 소백의 참 모습인데, 올 겨울 소백은 없다.
비로사 들머리부터 하마 맥이 빠지더라만, 주능선에는 설화가 만발했으리라 상상하고 걸었지 뭔가.
한해 한해 낡아가는 몸을 채근하며,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몇 년 더 써먹을 거 아니냐고 이를 앙다물었는데
꿈은 그저 꿈 자체로 아름답고 기대는 또 기대 자체로 아름다운 것. 눈길 11km를 어떻게 걸어왔나 몰라, 눈꽃도 없이 지루한 길을.
어젯밤 자정 무렵 날아온 문자 메시지를 생각하네.
가나다 순으로 정리된 핸드폰 주소록에서 내 이름이 맨 앞에 있어서 위로가 된다는 그녀.
드라마를 보며 울다가 내 전화번호를 눌렀다고, 언니가 있어서 참 좋다고... 아, 누구에겐가 위로가 되는 이름이라니!
나도 회신을 했다. '난 언제나 니 편이야. 넌 잘 될 거야. 행복하지 않으면 억울한 인생이잖아.'
나도 누군가에게 축원 받고 싶어. 내가 사랑한만큼 사랑받고 싶어. 진심을 거절 당하긴 싫거든.
겨울 소백의 똥바람을 맞고 정신이 번쩍 나네.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대로 내가 남을 대접했는가?>
화투라면 / 꾼 중의 꾼이었던 나도 / 다 늦게 배운 고도리 판에서는 / 판판이 깨어지고 박살납니다
육백시절의 그 울긋불긋한 꽃놀이 패를 (그러나! 고도리 판에서는 만년 똥 패를) / 미련 없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저 한물간 낭만주의에 젖어 / 이 시대의 영악한 포스트모던에 영합하지 못했던 겁니다
사랑도 움직인다는 016 디지털 세상에서 / 나는 어리석게도 아날로그 주제에 /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 생애도 / 버리지 못하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젖은 꽁초처럼 미련 없이 던져야 하는 데도 / 도무지 홍도의 순정으로 /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이상 히든 패가 아닌 세상 / 잊어야 하는 데도 / 언제 어디서나 흥얼거려지는 당신
흘러간 동숙의 노래처럼 /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이라면 / 당신은 분명 / 내 생애 최악의 똥 패인지 모릅니다
<박이화 '똥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