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보려고 새벽같이 나선 길, 자욱한 연무가 하루종일 시야를 가려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지리산 최고 전망대라는 금대산 삼봉산과 더불어 또 하나의 전망대로 꼽히는 법화산(法華山, 992.4m).

희붐한 여명의 고속도로를 달려 엄천강이 발 아래 누워있는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상마을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사진은 하산길 도정마을 쪽에서 본 함양 독바위(왼쪽)와 천왕봉 실루엣, 안타까운 조망이다.

"봄 날씨가 꼭 이렇더라. 시야가 없어서 오늘 산행 꽝이네!' 투덜거렸더니

"발 밑이 질척거리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야?" 남편이 대꾸한다. 하긴, 봄산이 이 정도면 호강이지.

얼었던 산이 녹으면서 발 밑에 흙덩이가 달라붙으면 처치곤란인데 근심같은 그 흙덩이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부정보다는 긍정. 없는 걸 탓하기 보다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함양 독바위 아래 포근하게 깃든 세동마을 다랑논>

 

 

대기는 봄이지만 산야는 아직 겨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초라한 나목들 속에 봄물은 오르고 있겠지만...

능선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가 자꾸 사진을 찍어준다며 이리 서봐라 저리 서봐라 채근한다.

"카메라 좋은 거 갖고 계시네요." 인삿말로 건넸더니 "이게 본체만 350만원짜리여. 렌즈는 더 비싼거여~"

"예에... 어쩜 그렇게 비싼 카메라를 다 갖고 계세요? 부럽네요..." 좋은 일하는 셈치고 립서비스를 해준다.

나중에 그가 찍은 사진 정보를 보니 메뉴얼은 한장도 없고 전부 프로그램 모드다. 그 비싼 카메라로... 아깝다.

  

해발 천미터에 오르면서 히말라야 원정대처럼 입고 온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아크트릭스를 비롯해 해외 유명 브랜드로 온몸을 휘감은 사람들, 모자부터 등산화까지 견적내면 기백만원이다.

지 돈 지가 쓰고 다니는데 누가 뭐랄까만, 십여년째 헌 배낭 메고 다니는 남편과 많이 비교된다.

새 배낭을 두고도 기어이 헌 배낭을 메고 나서는 남편이 야속할 때도 있다. 남들 눈에 '없어 보이는 것'같아 싫다.

나는 아직도 하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영원토록 하수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일본 지진 소식 때문에 썩 마음이 편치 않은 하루였다. 자연재해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법화사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며 여쭈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겁니까?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겁니까?

 

암병동에서 남편과 함께 죽음에 맞서고 있는 P언니를 생각한다. 혈액암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고 몇달째 입원중인 남편.

옆 병실에서 죽어 나가는 환자들을 수시로 보며 죽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두 내외는

병실에서 마주보이는 영안실에 엠블란스가 드나드는 걸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단다.

"여보, 오늘 영안실에 들어온 사람은 아주 젊대요. 아이들도 아직 어리대요."

"그래, 우리 애들은 다 컸으니 그나마 다행이재."

언제 덮쳐올지도 모르는 죽음 앞에서 그렇게 의연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신기하다.

"내가 저 사람 죽는 거 허락 안 할거야.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두고봐. 내가 운명과 맞붙어 이길 거야!"

언니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그래요 언니. 절대로 지지 말아요. 긍정의 강한 힘은 부정을 물리친대요.

 

 

 

 

 

봄 농사가 시작된 들에는 흙냄새가 고소하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새 희망을 심는 사람들. 저들은 아마 잿더미 속에서도 불씨를 찾아낼 것이다.

 

 

 

 

 

오르막에 엉치뼈가 무거운 것이 아무래도 산을 접을 때가 된것 같은데, 무릎이 부어올라 산을 끊어야 하는데...

이번이 마지막일까, 아니면 요 다음일까... 때로는 절망하며 때로는 오기를 부리며 산을 오른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으면 되겠지... 암만~

(사진은 그 비싼 카메라가 찍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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