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먼 산을 못 갔다 싶었는지 몸이 내게 앙탈을 부리더라구. 요즘 애들 말로 "아, 놔! 밖에 좀 나갑시다!!!"
지금쯤 산정에 철쭉이 한창이겠다 싶어 장흥 제암산을 찍었지. 철쭉으로 유명한 산 중에 유일하게 내가 못가본 산이거든.
꼭두새벽에 길을 나서 왕복 10시간 차 타고 산행은 널널 5시간 ㅎ
철쭉은 소문만 무성했지 토라진 가시나들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더라고. 쌀쌀맞긴!
매화말발도리가 활짝 핀 제암산 능선 아래 고흥 들녘이 보인다.
만개한 철쭉 사진을 웹에 올려놓고 지금이 적기인 것처럼 등산객을 모집한 산악회나
그걸 믿고 관광버스에 올라탄 내나 참 어리버리한 인생들이재. 도처에 사이비들이 설치거늘 쯪~
유일하게 이 사진 한 장 건졌네. 보성 앞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사자봉. 철쭉 몇 송이가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오늘 산행의 수확은 옆 자리에 앉았던 나홀로여인. 둘이 말문을 여는 순간 '동족'이라는 걸 알았다.
처녀 때부터 산에 다녔다는 그녀. 산이 그리우면 바람같이 날아 신불산이라도 한 바퀴 돌고 온다네.
긴 시간을 함께 해도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 있고, 잠시 같이 있어도 전류가 통하는 사람이 있재.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네가 못 나서도 아니야. 그냥 끼리끼리 통하는 거지. 그녀도 그런 말을 하더구만.
"마음에 안 드는데 억지로 좋은 척하며 살긴 싫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요. 있는 그대로의 타인들을 인정하구요."
와~우! 모처럼 멋진 사람을 만났네. 허위도 가식도 없는 소탈함이라니.
산정에 꽃이 없어 서운했던 마음이 봄눈처럼 녹아버렸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거구나.
하산길 자연휴양림에서 바라본 제암산 정상과 이제 막 봄물 오르는 정상 부근.
뒷날... 집에서 쉬나 계곡에서 쉬나 똑같다며 J가 기어이 나를 불러내더만. 산행 뒷날은 집에서 푹 쉬는 게 내 공식인데 ㅎ
소암골 계곡에 누워 반나절 내내 책을 읽었지. 실크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솨솨솨 물 흐르는 소리...
40쪽 쯤 읽고 났더니 상류로 올라갔던 일행들이 내려왔어. 배낭 가득 산나물을 캐서.
산나물에 열무김치, 저물녘엔 화전까지 부쳐먹었네. 아, 이렇게 행복할 수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말없이 지겨보고만 있어도 마음으로 통하는 사람들이 있지.
니가 잘나서도 내가 못 나서도 아니야. 아무 이해타산 없이 그냥 정서가 맞는 것일 뿐.
세상에 말이나 글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거... 나는 그늘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