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참 어중간한 계절이다.
쌈박한 풍경도 없고, 볼만한 꽃도 없고, 희뿌연 대기에 텁텁한 공기가 불쾌지수만 끌어올린다.
오래전에 약속된 여행이라 1박2일 태안을 다녀왔지만 왕복 10시간이 넘는 거리에 추억할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우리나라 사립수목원 제1호 천리포수목원.
희귀식물이 많고, 특히 목련 종류가 많기로 유명하다.
김혜숙의 시에 등장하는 실거리나무를 만난 게 인상에 남는다.
인연이란 / 우연히 산길 걷다가 / 그대 옷깃에 걸린 실거리나무 같은 것
원하지 않아도 / 그때 그곳에 있었으므로 <김혜숙 ‘실거리나무’ 전문>
실거리나무는 낚시 바늘같은 가시가 달려있어 한번 걸려들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인연은 때로 그런 것이다.
그 유명한 만리포해수욕장. 한때 국내 최대의 해당화 군락지였다는데.
인파에 짓밟혀 오래전에 멸종된 해당화는 가느다란 줄기 몇 그루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췌 사람 손에 남아나는 게 없단 말이지.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 몽산포, 구름포.... 이름은 모두 그럴싸하더라만 ㅎ
날씨는 덥고, 시야는 흐리고, 고만고만한 해변들에 싫증이 나서 꽃지해변으로 일몰을 보러 갔다.
모래결을 제대로 찍어보고 싶었는데.
빛을 캐는 여인.
오래전, 아마 초겨울쯤이었던가. 꽃지 일몰을 보러 갔었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군중 속의 고독이었다.
꽃지 해변에 도열한 삼각대와 카메라에 압도되어 제대로 사진도 못찍고 너무 추워서 차 안에서 벌벌 떨었다.
그래도 그땐 일몰이 황홀했었는데. 무릎 수술 후유증으로 신산했던 내 마음을 아름다운 일몰이 위로해주었는데.
뒷날 아침 신두리사구를 찾았다.
일행들이 백사장에서 조개를 잡는동안 나는 모래 구릉을 헤맸다.
모래지치가 하얗게 핀 신두리사구.
모래 요정 바람돌이 캐릭터는 이 꽃을 보고 만든 게 아닐까?
'카피카피 룸룸 카피카피 룸룸' 잊었던 노래가 생각나 혼자 즐거웠다.
(근데 저 꽃이 모래지치 아닌가벼. 꽃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지도 모른다 카네.)
1만5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해안의 작은 사막.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라는데... 시기적으로 좀 늦었다.
삘기풀도 지고, 해당화도 지고... 바람 무늬(風紋)를 보기에도 너무 늦었다.
해당화 군락이 여기 있었네.
신두리해수욕장의 이른 아침. 갯벌 속에서 떡조개 잡느라 신이 난 일행들.
의항해변에서 구름포해수욕장을 돌아오는 태배길(6.4km)을 걸었다.
2007년 기름 유출사고로 전국의 120만 자원봉사자들이 손으로 기름을 닦아낸 곳.
태안의 마을길, 숲길, 해변길을 묶은 아름다운 태배길, 한적해서 더 좋았다.
한 고개 돌아서면 나타나는 백사장은 결 고운 모래와 해당화, 갯메꽃이 어우러져 은은하게 아름다웠다.
이태백이 반했다는 이 길에 나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해안 절경이사 우리 동네가 더 낫다는 생각. 일망무제의 동해만 보고 살아서 그런가?
이젠 밑천이 딸려서 여행 가이드도 못하겠다. 다음부터는 남들 뒤만 따라다녀야지.
아무 말없이 남들 하자는대로 하고 살아야지. 정말 아무 생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