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이 하나 생겼네요. 장기근속 기념으로 회사에서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보내준다는데....”

편하게 지내는 지인 하나가 전화 통화 끝에 불쑥 내뱉었다.

자랑도 여러 가지로 하시네요. 그게 무슨 고민이라고.”

내가 핀잔처럼 말을 받았더니 금새 진지한 어조로 변해서 이러는 거였다.

요즘 졸혼(卒婚) 해혼(解婚) 그런 말이 유행이잖아요. 근데, 알고 보니 우리집은 오래전부터 그런 거 하고 있었더라구요.

우리가 시대를 앞서갔다고나 할까, 하하하!!!”

그들은 오래전부터 각방을 쓰고 지냈으며,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고 한 집에서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해외여행을 가면 한 방에 자야 하는데 불편해서 어떻게 하느냐는 고민이었다.


부부동반 모임에 나란히 참석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가장 편한 자세로 쉬다 잠든다는 부부.

쉽게 말해 사이좋은 별거부부다.

남편은 시골 취향이고, 아내는 도시 취향, 남자는 과묵하고 여자는 말이 많다.

남편은 운동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움직이길 싫어한다. 텔레비전을 봐도 남자는 다큐멘터리를, 여자는 드라마를 본다.

한 쪽이 양보하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 아이들 키울 때는 참고 양보했지만 둘만 남았으니 거리낄 것이 없다.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거다.

정서와 취향이 다르다보니 대화가 이어질 리가 없다. 몇 마디만 건너가면 짜증이 나고 큰소리가 오간다.

한때는 싸우기도 했지만 이제 서로에게 지쳐서 포기한 상태다.


하지만 막상 이혼할 용기는 없다. 양가에 분란 일으키고 싶지 않고, 주변에서 보는 눈들도 따갑게 느껴진다.

재산을 나누는 것도 골치 아프고, 무엇보다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사실은 이대로 사는 게 편리하고 실용적이다.

따로국밥보다 한솥밥이 훨씬 경제적이고 혼자이되 혼자이지 않은 상태가 안전하고 편리한 것이다.

그런데 졸혼 해혼이 우리집만 그런 거 아니던데요. 친구들과 얘기해보니 대부분 저하고 비슷하던데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부부가 많더라고요.”


그럴지도 모른다. 결혼한 지 30년쯤이면 상대방에게 어떤 신비감도 매력도 없어질 때가 되지 않았나.

사랑보다 신뢰나 연민으로 살아가는 사이. 그저 곁에 있어주어서 고마운 사이. 서로 구속하지만 않는다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남이 안 보면 갖다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고 했다.

 부부나 가족은 너무 가까워서 서로에게 기대가 크고, 그만큼 상처도 깊은 것이다.


서울에서 황혼 이혼(27%)이 신혼 이혼(25%)을 앞지른 게 벌써 5~6년 전이라고 한다.

50~60대 남녀 절반이 "남은 인생은 나를 위해 살겠다"고 한 여론조사도 있었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의 졸혼보다

혼인이라는 제도를 매듭 풀듯 풀어서 상대에게 자유를 준다는 해혼이 더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알고보면 쇼윈도우부부의 다른 말이고 유사 이혼이나 별거인 셈이다.
부부는 노년에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

그 친구를 포기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사람들의 용기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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